강화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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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유수부 동헌 정측면
강화유수부 동헌 정측면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수도 방위를 목적으로 강화에 설치되었던 특수 행정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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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수도 방위를 목적으로 강화에 설치되었던 특수 행정기관.
내용

조선왕조는 수도 방위를 위해 한성부 주변의 행정적·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주·부·군·현의 일반적인 행정 체계와는 별도로 특수 행정 체계인 유수부를 설치, 운영했다.

전기에는 고려의 국도였던 개성과 태조의 어향(御鄕 : 王家 선조의 관향)인 전주에, 후기에는 개성·강화·수원·광주(廣州) 등 4도(都)에 설치, 운영하였다. 즉,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 방위 체계의 강화를 절감한 조선왕조는 행정력과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주력해 비변사의 기능 강화와 5군영제로의 군제 개편을 단행하였다.

아울러 도성방어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군사적 요충지로서 한성부와 인접해 있으면서 좁은 해협을 끼고있어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는 강화부를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강화부는 부와 유수부로 강등과 승격을 반복하다가 1906년 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군(郡)으로 개편되었는데, 그 연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413년(태종 13) 도호부로 승격된 강화부는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가 잠시 강화로 피난을 하였다가 환도하면서 강화유수부로 승격시켰다. 그 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세자빈과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 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한 다음 남한산성에 들어가 항전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강화성이 함락되고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청나라와 강화하였다.

조선왕조에서는 청나라에 대한 복수의 일환으로 북벌을 계획하고 방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1656년(효종 7) 강화부에 광성보(廣城堡) 등의 진보(鎭堡)를 설치하였다. 또한, 1678년(숙종 4)에는 강화부윤이 진무사(鎭撫使)를 겸직하게 하고 강화만 일대를 방어하는 5영(營)을 통솔하게 하였다. 다음 해에는 53돈대를 설치하였고, 1692년과 1710년에는 강화 내·외성을 축조해 강화부는 내성·외성·12진보·53돈대의 이중삼중의 방어 체계로 요새화되었다.

1865년(고종 2) 당시 강화부의 직제는 유수 2인(1인은 경기관찰사 겸임), 경력(經歷) 1인, 분교관(分敎官) 1인, 검률 1인, 서리(書吏) 50인 등이 소속되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에 침략한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국함대가 강화의 초지진과 덕진진·광성보를 점령한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1874년 강화도 동쪽 해안에 포대를 설치해 외침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75년 일본 군함이 포격을 가해 초지진과 포대가 완전히 파괴되는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이 일어났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일본의 강압으로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은 일본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강화유수부는 1896년 강화부로 개편되었고, 1906년 다시 강화군으로 개편되었다.

참고문헌

『대전통편』
『대전회통』
『여지도서』
『강화사』(강화사편찬위원회, 1976)
『경기도사』(경기도, 1979)
「조선왕조의 유수부경영」(이존희, 『한국사연구』 47,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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