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5년(성종 14)에 설치되었다. 즉, 919년(태조 2)에 설치되었던 개주(開州)를 당나라 경조부(京兆府)를 모방하여 개성부(開城府)로 개편하고 부윤을 두어 그 관하에 6개의 적현과 7개의 기현을 두었다.
그때까지 왕도의 특별구는 송악군 중심의 개주뿐이었는데, 이때 왕경(王京) 밖에 왕경을 보호하여주는 기보지역(畿輔地域)으로 적현·기현이 신설된 것이다. 이러한 적현·기현은 본래 당나라의 제도를 본뜬 것으로 왕경에 근접한 것을 적현, 그 방읍을 기현이라고 하였다.
기현은 강음(江陰)·장단(長湍)·토산(免山)·임강(臨江)·적성(積城)·파평(坡平)·마전(麻田)의 7현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가 않다. 6개의 적현이나 7개의 기현은 다같이 개성부윤의 관할하에 있으면서 그 자체 수령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으로서, 통치제도상 구별은 없는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은 것같다.
적·기 13현은 1018년(현종 9)에 크게 개편되어 개성부가 혁파되고 경내(京內) 5부와 경기 12현으로 구분되었으며, 경기 12현은 다시 개성현과 장단현에 현령을 설치하여 각각 3현과 7현을 관할하여 이원적으로 통치함과 동시에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속시켰다.
이것은 종래의 적현과 기현지역이 왕경도 포함한 데 대하여 새로운 경기는 왕경 이외의 기보지방만을 가리키게 된 것으로, 경내가 독립되어 경기에서 탈락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995년의 적현·기현의 설치는 바로 고려 경기제(京畿制)의 모체인 동시에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적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