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년(태조 2) 태조 왕건이 송악(松嶽)에 도읍을 정하면서 이곳을 개주(開州)로 삼았는데, 개주는 수도의 통치영역을 아울러 지칭한 것으로 수도와 그 주변지역을 합쳐 만든 왕기(王畿)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960년(광종 11)에 개경을 고쳐 황도(皇都)라고 하였다. 이는 곧 황제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에 따르는 도성의 정비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987년(성종 6)에 태조대의 개경 5부방리제(五部坊里制)를 재정비하고, 995년(성종 14)에 개주를 고쳐 개성부(開城府)라 하고 적현 6개와 기현(畿縣) 7개를 관할하게 했던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이때의 적·기현제는 당나라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으며, 도성에 근접한 지역을 적현으로 그 방읍(防邑)을 기현이라고 하였다.
수도 개경의 기보 지역을 정식으로 ‘경기’라고 한 것은 1018년(현종 9)의 일이었고, 이는 성종 14년에 시행하였던 적·기현제를 개편한 것이다. 즉 지금까지의 개성부를 없애고 개성현령(開城縣令)을 두어 정주(貞州)·덕수(德水)·강음(江陰) 등 3현을 관할하게 하고, 또 장단현령(長湍縣令)을 설치하여 송림(松林)·임진(臨津)·토산(兎山)·임강(臨江)·적성(積城)·파평(波平)·마전(麻田) 등 7현을 관할하게 하여 모두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속시켰는데, 이를 ‘경기’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보면 경기제의 시초는 성종 14년의 일로서 태조 2년에 설치된 개주를 개편하여 개성부를 설치한 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성종 대에 설정된 적·기현 13현의 구체적인 지역은 확인할 수 없지만, 현종 9년의 경기 12현과 같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