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양연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진 바가 없으나 주로 충혜왕의 측근으로 활동했던 인물로 추정된다. 그것은 박양연이『고려사(高麗史)』열전(列傳) 폐행전(嬖幸傳)에 입전되어 충혜왕이 총애하던 신하로 등장하고 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박양연은 일찍이 친종호군(親從護軍)으로 있을 때 내승(內乘: 임금이 타는 수레를 관장하던 관직)을 맡아 몰래 양마(良馬) 8필을 바꿔치기 하다가 발각되어 포 400필을 징수당하고 귀양갔다가 뒤에 풀려 대호군(大護軍)이 되기도 했다. 1343년(충혜왕 복위 4)에는 삼현(三峴: 지금의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에 신궁(新宮)을 축조하면서 왕이 박양연・김선장(金善莊)・민환(閔渙) 등에게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이 때 왕에게 아첨하기 위하여 공사를 크게 벌여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었으므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들었다.
같은 해 8월에 원나라에 있던 이운(李芸)·조익청(曺益淸)·기철(奇轍) 등이 원나라의 중서성(中書省)에 충혜왕의 탐음부도(貪淫不道)함을 지적하며 입성(立省)을 청하자 왕이 원나라에 끌려갔다. 이 때 박양연도 왕을 시종하면서 잘못되게 한 임신(林信)·최안의(崔安義)·김선장(金善莊) 등 10여 인과 함께 붙잡혀 원나라에 압송되었다가, 그 이듬해 원나라 조정에 의해 항주로(杭州路)로 유배되었다.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