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 ()

건축
개념
왕이 거주하는 왕성과 백성들의 주거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
이칭
이칭
왕도(王都), 국도(國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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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도성은 왕이 거주하는 왕성과 백성들의 거주 지역을 아우르도록 쌓은 성곽이다. 국도 또는 왕도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도시를 둘러싼 성벽을 읍(邑)이라 하였으며, 읍이 국(國)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통합 권력의 상징인 종묘와 사직을 갖추고 있는 읍을 도(都)라 하였다. 따라서 도성은 백성의 거주 지역을 아우르는 외곽 성이 없더라도 왕이 거주하는 지역을 의미하였으므로 왕도라 부르기도 한다.

키워드
정의
왕이 거주하는 왕성과 백성들의 주거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
내용

용어 설명

성곽(城郭)이라는 용어는 왕이 거주하는 내성(城)과 백성들이 거주하는 외성(郭)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곽도 도성을 의미한다. 중국 역대 왕조의 도성 건설의 기본이 된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 의하면 중국의 도성은 왕성을 중심으로 앞에는 조정, 뒤에는 시장, 좌측에는 종묘, 우측에는 사직을 배치하였다. 왕성의 남북과 동서의 축선을 중심으로 간선 도로를 구축하고, 외성의 내부를 따라 순환 도로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평지가 넓지 않고,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중국과 같은 정형화된 도성은 조성되지 않았다. 다만 왕성을 중심으로 구획된 도로와 관청, 사찰, 왕릉 등이 계획적으로 배치되는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중국처럼 내성과 외성의 복합 구조를 이루는 성들은 많지 않았으므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도성은 왕이 거주했던 왕성과 도시 일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폭넓게 받아들이고 있다.

고구려

고구려의 도성은 평지성과 산성이 세트를 이루고 있다. 평지성은 왕을 비롯한 지배 계층의 평상시 거성이며, 산성은 전시나 군사적인 비상시에 지배 계층뿐만 아니라 국인들이 모두 들어가 수성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고구려의 초기 도성인 환인 지역에는 평지성인 하고성자성과 오녀산성이 있었다. 기원 3년에 집안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평지에 국내성이 있었고, 이곳에서 약 4km 거리에 환도산성이 있었다. 427년(장수왕 15)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의 평지성은 안학궁성 또는 청암리성이며 배후 산성은 대성산성이었다. 586년(평언안 28)에 천도를 단행한 장안성은 북성과 내성, 중성, 외성의 복합성으로 구축되었다. 내성은 왕궁, 중성은 행정 관청, 외성 지역에는 백성들이 거주하였으며, 외성에는 조방제를 채용하여 도로와 거주 지역을 구획하였다. 고구려는 6세기 후반경에 이르러야 발달된 도성 형태를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성 백제 시기

한성 백제 시기의 도성은 북성과 남성의 2중성 체제를 갖추었다. 평지성인 북성은 평상시 왕의 거성이었으며, 산성이었던 남성은 전시에 대피하던 피난성이었다. 북성은 풍납토성으로 남성은 몽촌토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구려의 침략으로 웅진으로 천도한 시기에는 공주 공산성을 중심으로 왕성 중심의 왕도가 구축되었다. 538년 사비 천도 이후에는 왕성인 부여 부소산성과 길이 6.3km에 달하는 부여 나성을 갖추어 본격적인 도성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신라

신라는 왕성인 경주 월성을 중심으로 왕도가 확장되었다. 469년(자비왕 12) 도성 내에 조방제를 실시하여 360방 35리로 구획되었는데, 그 규모는 동서 160m, 남북 140m였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처럼 왕경(王京)을 둘러싼 외곽 성이 없었지만 동쪽에 명활산성, 서쪽에 서형산성과 경주 부산성, 남에는 남산신성, 동북쪽에는 북형산성을 쌓아 도성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통일 직후인 681년(문무왕 21) 비로소 도성을 건설하려 하였으나 의상 법사의 만류로 역사를 중지하였다.

가야

가야는 통일 국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소국마다 그 중심 주에 왕성과 방어성이 구축되었다. 금관가야의 왕성은 봉황토성이었으며, 아라가야의 왕성은 가야리토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가야리토성은 둘레가 2.5km에 달하여 경주 월성보다 규모가 크다. 합천 성산토성은 다라국의 왕성으로, 고령 대가야 궁성지는 배후 산성인 주산성과 함께 대가야의 왕성으로 비정(比定)되고 있다. 고성 지역의 동외동 패총과 만림산토성은 소가야의 왕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야의 왕성들은 수상 교통이 편리한 완만한 독립 구릉 위에 토성으로 구축되었으며, 왕성에서 가까운 곳에 왕릉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고분군과 중심 취락지, 생산 시설 등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발해

발해의 첫 도읍지는 동모산성으로 추정되며 그 후 중경과 상경으로 옮겨 가는데, 약 200여 년 동안 도읍한 곳은 상경용천부이다. 상경성의 규모는 16.2km에 달하며 성문은 동서에 2개소, 남북에 각 3개소로 10개가 설치되었다. 11조의 대도를 중심으로 구획된 방리가 설치되어 전형적인 도성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고려

고려의 도성은 개성에 설치되었다. 개경에는 궁성과 황성 외에는 성벽을 축조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현종 때에 거란족의 침입 이후 나성을 축조하여 1029년(현종 20)에 완성하였다. 1377년(우왕 3)에 내성을 축조하기로 하였으나 1393년(조선 태조 2)에 완성되었다. 이로써 개경은 궁성, 황성, 내성과 외곽을 갖춘 도성 체제가 완비되었다. 고려 말엽에는 몽골의 침입으로 인하여 강도로 천도하여 도성을 축조하였다. 강도의 도성은 내성, 중성, 외성의 3중성을 갖추게 되었으며, 기단식 판축 토성으로 구축되었다.

조선

조선은 1394년(태조 3) 한양으로 천도하여 궁궐, 종묘, 사직 및 관아를 건설하고 1395년에는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정도전을 책임자로 하여 도성을 축조하였다. 한양 도성은 1396년(태조 5) 118,070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59,500척의 성곽을 49일 만에 쌓았다. 그러나 흥인문 부근에는 지형이 낮고 웅덩이로 되어 있어 공사가 완공되지 못하였으며, 7월의 폭우로 수구(水口)와 옹성과 성벽이 무너져, 그해 8월 79,400명을 동원하여 2차 공사를 실시하였다. 한양 도성의 성벽은 북악, 낙산, 남산, 인왕산의 능선과 평지를 연결하여 축조한 평산성이다.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 등 8개의 성문을 설치하였다. 성내에는 정연하지는 않지만 지형을 따라 십(十)자 형태의 가로망을 구축하였다.

당초 판축 토성으로 구축되었던 태조 대의 한양 도성은 세종 대에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도성수축도감을 설치하고 8도의 장정 322,400명이 수축 공사에 동원되었다. 이후 숙종 대와 순조 대에도 대대적인 수축이 이루어졌으며, 수축 시기별로 축성 기법이 달랐던 것이 확인된다. 태조 때의 석축은 부정형의 할석이 주로 사용되었고, 세종 대에는 하단부에는 대형의 가공석이 상단부에는 너비 30cm 정도의 화강암 가공성 돌이 사용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숙종 대의 성벽은 북한산성처럼 40~50cm 크기의 장방형 성돌을 그랭이질하여 쌓았으며, 순조 대에는 가로 · 세로 60cm 크기의 정방형 성돌을 사용하였다.

한양 도성은 내성과 외성을 갖추지 않았으며, 숙종 대에 이르러 방어성인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이 구축되어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왕도 방어 시스템인 평지성과 산성의 결합으로 회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도성은 왕성과 외성이 결합된 복합성의 구조보다는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방어 시스템이 선호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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