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성(子城) 또는 내성(內城)·왕성(王城)·재성(在城:왕궁과 관아를 둘러싼 성)의 바깥에 있는 넓은 주거지까지 에워싼 이중의 성벽을 일컬으며, 나곽(羅郭)이라고도 한다.
특히 도성(都城)의 구조에서 왕궁과 관청을 두른 왕성이나 재성의 둘레에 있는 일반주거지를 포용하여 크게 쌓은 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흔히 쓴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평지의 왕성과 그 배후에 있는 산성이 조(組)를 이루고 있는 도성이 일반적이었다. 고구려의 처음 도읍지와 평양의 안학궁성(安鶴宮城)·대성산성(大城山城), 백제의 한성(漢城)과 한산성(漢山城)·북한성(北漢城)과 북한산성(北漢山城), 신라의 월성(月城)과 명활산성(明活山城) 등이 모두 평지의 왕성과 배후의 산성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상황을 보여준다.
6세기경에 이르러서야 대략 나성을 갖춘 도성제가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고구려의 평양성이 산지의 산성과 이어진 평지의 넓은 시가지를 포함한 나성으로 이루어진 이중구조로 바뀌었고, 백제의 웅진(熊津)·사비(泗沘)의 두 도성도 산 위의 성과 평야를 에워싼 나성이 결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신라의 경우는 나성이 축조되지 않고 경주평야주변의 동서남북 산 위에 산성을 쌓아 나성의 기능을 대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나성이라는 말이 사용되어 큰 성을 나성, 나성 안쪽의 작은 성을 자성, 나성 바깥의 3중 성벽을 아성(牙城)이라 하였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삼국시대의 도성에서 나성의 용어가 이미 사용된 듯하며, 자성에 해당하는 것은 재성으로 불렀다. 도성이 아닌 요동지방의 고구려 지방도시인 남소성(南蘇城) 등지도 나성을 갖추었던 기록이 남아 있다.
고구려·백제식의 도성제도인 왕성·나성의 제도는 고려에도 이어졌다. 고려의 개경은 처음 왕성뿐이었으나, 거란족의 침입시기인 11세기 초기에 나성이 축조되었다. 즉, 1029년(현종 20)에 20년의 세월이 걸린 축조공사 끝에 궁궐과 일부 관청을 둘러싼 당초의 왕성 바깥으로 민가지역과 얼마간의 전원(田園)까지 포함한 나성이 완성되었다.
그 규모는 둘레가 2만9700보(步)로 나각(羅閣)이 1만3천칸이며, 대문 4개, 중문 8개, 작은문 13개로서 인부 30만4400여명이 동원되었다고도 하고, 또는 인부 23만8938명과 공장(工匠) 8,450명이 동원되어 둘레 1만660보, 성벽높이 27척(尺), 성벽두께 12척, 낭옥(廊屋) 491칸의 규모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나성제도는 조선시대에도 이어졌으나 한양도성은 나성적 성격의 성벽은 하나뿐이고 내부에 따로 내성을 쌓지 않았으므로, 시가지를 전부 에워싸고 있으나 나성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성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