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숭산성(美崇山城)은 대가야의 왕성(王城)으로 추정되는 주산성에 인접해 있으며, 성의 남쪽에는 대가야의 철산지(鐵産址)가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지리적 특징으로 인해 그동안 이 성은 가야의 산성으로 추정되어 왔다. 1983년 경상남도 기념물 67호로 지정되었다.
미숭산성은 2001년 지표 조사를 시작으로 2002년 8월 1일부터 8월 30일까지 남문지의 정비 구간에 대한 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 조사 과정에서 청자 조각과 분청사기, 백자, 어골문(魚骨文) 기와 조각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이로 인해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에 이 산성이 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게 되었다.
미숭산성이라는 이름은 고려 말기 이미숭 장군이 조선 왕조가 세워지는 것에 불만을 품고 이곳에 와 성을 쌓고 저항한 데서 유래하였다. 고려시대에 몽골이 침입했을 때나 왜구가 침입했을 때면 인근의 주민들이 이곳에 들어와 농성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산성은 해발 755m 미숭산 정상의 달각암을 기준으로 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다. 서쪽은 산의 8부 능선을 따라 지어져 성의 형태는 삼각형에 가깝다. 성벽은 대부분 무너진 상태이다. 조사 결과 성벽의 몸체 부분은 지대석을 놓고 20cm 정도 크기의 부정형 할석을 안쪽으로 들여 허튼층쌓기를 하였으며 돌 사이에 쐐기돌을 많이 사용했다. 또한 성벽의 몸체 바깥쪽만 벽을 쌓은 후 내벽의 상단부는 몇 단의 석재로 마감하였다.
남문은 너비 4.2m로 개거식(開渠式)으로 지어졌다. 입구 바깥쪽 좌우에는 1.5m 간격으로 원형 구멍에 문지도리 역할을 하는 돌이 있으며, 문을 받치는 초석이 일렬로 쭉 이어져 있다. 이곳에서 많은 양의 기와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남문 입구와 양쪽 벽을 포괄하는 문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문지의 양측 벽은 성벽에 사용된 것보다 큰 할석을 사용하였으나, 통줄눈이 확인된다. 사용된 돌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다.
동문의 구조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너비 1.5m 정도 되는 문의 혼적이 확인된다. 따라서 이 문은 적의 눈에 띄지 않도록 만든 암문(暗門)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미숭산 정상의 달각암 일대에서도 돌로 만든 시설이 확인되는데, 이것은 봉수대와 관련된 시설로 추정하고 있다. 성벽 내부에서는 직경 12cm 내외의 석환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따라서 성을 방어하기 위해 석환을 날리는 투석기가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미숭산성의 내부에서 삼국시대의 토기 조각도 수습되어 험준한 지형을 선호했던 가야의 방어 시설로 건설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성의 해발 고도가 너무 높아 일반적인 삼국시대 성곽의 입지와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입지나, 규모, 성벽을 쌓은 수법, 출토 유물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미숭산성은 대규모 이민족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쌓은 고려시대의 입보(入保)용 산성으로 추정된다. 미숭산성의 둘레는 1,325m로 고려시대 입보용 산성 중에서는 규모가 작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