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양도성 (서울 )

건축
유적
문화재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시대 수도 한양의 도성.
이칭
이칭
서울성곽
유적
건립 시기
1396년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정도전
둘레
18,127m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 6길 26-17외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서울 한양도성(서울 漢陽都城)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서울 종로구 누상동 산1-29번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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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서울 한양도성은 조선시대 수도였던 한양을 방어하기 위하여 쌓은 성곽이다. 백악산과 인왕산, 목멱산, 남산을 연결하여 쌓은 평산성이며, 둘레는 18,127m에 달한다. 1396년(조선 태조 5) 축성을 시작하여 2년 뒤인 1398년에 완공하였다. 1422년(세종 4)에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였으며, 영조 대를 거쳐 숙종 대에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졌다. 성벽에는 숙청문과 흥인문, 돈의문, 숭례문 등 사대문과 혜화문, 광희문, 창의문, 소덕문 등 사소문 등 8개의 성문이 있었다.

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시대 수도 한양의 도성.
건립 경위

서울 한양도성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성곽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으로 천도하기 위하여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1396년부터 2년에 걸쳐 성곽을 축조하였다. 성곽의 축조는 전체 규모인 59,500척을 1구간 600척씩 97구간으로 나누어 축성하되, 2개 구간마다 판사, 부판사 1명씩을 배치하고 사, 부사, 판관 등 12명을 배치하여 공사를 감독하였다. 1구간은 다시 6호로 나누어 책임자를 두는 등 치밀한 계획을 수립하고 공사에 임하였다. 각 구간마다 천자문의 순서를 따라 '천, 지, 현, 황...' 순으로 번호를 매겨 적(吊)자에서 끝나고 있다.

축성 공사에 동원된 인원수는 총 11만 8,490명에 달한다. 성벽 외측 면석에는 감독자의 이름과 담당 군명, 자호 등을 새겨 넣었다. 성터가 높고 험한 곳은 석축으로 쌓았으며, 평지 구간은 토성으로 쌓았다. 태조 때 쌓은 성곽은 둘레 89,610척, 높이 40척, 여장 4,664첩이며, 치성 6군데가 신축되었다. 사대문사소문은 1398년에 완성되었다.

태조 때의 석축 성벽은 가공하지 않은 편암계의 할석을 사용한 허튼층쌓기 방식을 특징으로 한다. 주로 남산 구간에서 태조 때 쌓은 성벽이 확인된다.

변천

이어서 1422년(세종 4)에 대대적인 수축이 이루어졌다. 세종은 '도성수축도감'을 설치하고 각도에서 차출된 32만 2천 명의 인부와 수백 명의 감독관을 동원하여 38일 만에 성곽 수축 공사를 끝마쳤다. 이때의 개축으로 도성은 둘레 89,610척,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군데가 되었으며, 곡성(曲城) 1군데, 성랑(城廊) 15군데를 만들었다. 태조 때 토성으로 쌓은 구간을 모두 석축으로 개축하였으며, 성벽의 높이도 처음보다 1척을 높게 쌓았다. 세종 대에 수축된 성벽은 지대석 위에 너비 3척, 두께 2척 정도의 장대석을 2~3단 정도 놓고, 너비 30cm 크기의 잘 가공된 화강암 성돌로 정연하게 쌓은 성벽을 특징으로 한다.

그 뒤 1426년(세종 8)에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고 성문과 성벽을 보호하게 하였고, 1447년(세종 29)에 남대문( 서울 숭례문)을 다시 세웠고 1479년(성종 10)에는 남대문을 중수하였다.

1451년(문종 1) 1월부터는 경기·충청도의 수군(水軍) 3천 명으로 성벽을 수축하였다.

임진왜란 때 함락되어 왜군에 의하여 왜루(倭壘)가 쌓아졌지만, 이듬해에 수복하여 왜루를 철거하고 그 돌로 다시 수축하였다. 1616년(광해군 8)에 부분적인 수축을 하였다.

이후 1704년(숙종 30)에 5개월간 대대적인 수축 공사가 이루어졌다. 숙종 대에 수축한 성벽은 가로 2척, 세로 1.5척 정도 크기의 대형 장방형 석재를 사용하여 화포 공격을 받더라도 성벽이 쉽게 붕괴되지 않도록 하였다. 숙종 대의 성돌은 직육면체에 가깝지만, 순조 대 성돌의 경우 외면은 정방형으로 정연하지만 뒤 뿌리 쪽은 무게를 줄이기 위헤 과도하게 뾰족하게 하여 사각추 형태에 가깝다.

1743년(영조 19)에 부분 보수를 하였고, 성첩도 회분(灰粉)으로 단장하였으며,순조 대에도 지속적으로 수축이 이루어졌으며, 가로 2척, 세로 2척의 정방형으로 규격화된 성돌은 순조 대에 수축한 성벽의 특징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새로운 교통 수단인 전차가 등장하면서 1898년 동대문( 서울 흥인지문)과 서대문( 돈의문), 남대문 일대의 성벽을 허물기 시작하였으며, 국권을 상실한 1905년 이후에는 대대적으로 훼손되기에 이르렀다. 1907년에는 일본 왕자의 서울 방문을 앞두고 경호상의 이유를 들어 '성벽처리위원회'라는 조직을 동원하여 사대문과 사소문 주변의 성벽을 훼손하였다. 서울의 도시화로 인하여 성벽의 훼손은 가속화되어 삼청동, 장충동 일대와 산지 구간 일부만 성벽이 남게 되었다.

발굴 경위 및 결과

서울 한양도성에 대한 보수 정비는 1963년에야 시작되어 인왕산북악산 일대의 성벽을 보수하였다. 이후 창의문과 혜화문이 복원되고, 숙청문, 광희문 문루가 복원되는 등 계속적인 복원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서울 성곽의 복원 사업은 학술적인 고증이 간과된 상태에서 이루어져 성벽의 몸체 부분과 여장은 기형적으로 복원되었고, 성곽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었던 성랑은 전혀 복원되지 않아 흔적을 찾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한양도성에 대한 학술 조사는 1999년부터 2016년까지 23건의 시굴 및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초기의 발굴 조사는 건물이나 도로 등의 개발 공사에 따른 발굴 조사였다. 2003년에 실시된 서울 청계천 복원 구간 내 오간수 문지 발굴 조사와 2008년 동대문운동장 유적 발굴 조사는 대표적인 개발 관련 발굴 조사에 해당한다. 특히 동대문운동장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 일제강점기에 해체되고 매몰되어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되었던 성벽 유구와 이간 수문, 건물지 등이 확인되어 일부는 정비하여 보존하고 있다.

2008년 남산 봉수대지 발굴을 시작으로 하여 한양도성의 정비 복원을 위한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추진되어 서울 회현 성곽 지구와 백범 광장 발굴 조사 등을 통하여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한양도성의 축성법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축성을 위한 기초 공정과 성벽의 몸체 부분의 축성 방법, 오간 수문과 이간 수문, 성랑의 위치와 구조를 확인하였다. 성벽에서 확인된 각자성석(刻字城石)을 바탕으로 성벽의 초축과 수·개축 시기를 태조, 세종, 숙종, 순조 대의 네 시기로 구분하고 각 시기별 특징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태조 대의 성벽은 성돌의 크기와 형태가 일정하지 않고 편암계의 성돌이 대부분이다. 부정형의 성돌로 인하여 쐐기돌이 많이 사용되었다. 세종 대의 성벽은 화강암 가공 성돌을 특징으로 한다. 하부에는 대형의 석재를 사용하고 상부에는 너비 30cm 크기로 규격화된 작은 성돌로 정연하게 쌓았다. 성벽 하부에는 지대석을 놓고 외부에는 퇴박석을 깔았다. 숙종 대의 성벽은 한 변이 40-45cm이고 두께가 조금 작은 장방형 가공 성돌을 특징으로 한다. 북한산성이나 탕춘대성 등 숙종 대의 성곽처럼 그랭이 기법을 통하여 성돌이 서로 맞물리도록 쌓은 것이 특징이다. 순조 대의 성벽은 한 변이 약 60cm인 정방형 성돌을 특징으로 하며, 뒤 뿌리의 길이는 90cm로 좁고 길쭉한 형태로 가공되었다.

오간수 문지에서는 기초부에 잡석층, 박석층, 잡석 다짐층, 지정 말목 순으로 축조되었다. 이간 수문에서도 지정 말목-잡석 기초-바닥석-홍예문 등의 네 공정으로 구축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치성은 동대문운동장 유적에서 유일하게 1기가 확인되었다. 도성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었던 성랑은 남산 봉수대지에서 확인되었으며 외벽부를 석축 벽으로 하고 안쪽이 열려 있는 3칸 규모이다. 이는 북한산성 성랑 구조와 동일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의의 및 평가

서울 한양도성은 조선시대 성곽을 대표하며, 각 시기별 축성 기술의 변화 과정을 복합적으로 보여 주는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도성 발굴의 기록3-종합보고서』(서울역사박물관,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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