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동쪽 문으로 일명 동대문(東大門)이라고도 하는데, 서울 도성의 사대문 가운데 동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397년(태조 6) 도성을 쌓을 때 함께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세워졌다. 1452년(단종 1)에 중수가 있었으며, 조선 말기까지 존속되어오다가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전반적인 개축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흥인지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계형식(多包系形式)의 우진각지붕건물이다. 문의 석축은 화강암을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았고 중앙에 홍예(虹霓: 무지개 모양의 문)를 틀어 출입구를 삼았으며, 석축 위에 목조의 2층 누각을 세웠다.
문의 바깥쪽에는 석축 한쪽에서부터 반원형의 평면을 이룬 옹성(甕城: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쳐서 적을 방어하는 작은 성)을 쌓아 적에 대한 방비를 견고히 하였는데, 도성 내의 여덟 개의 성문 중 옹성을 갖춘 것은 이 문뿐이다. 이 옹성 역시 창건될 때부터 마련된 것이며, 고종 때 다시 개축되었다.
옹성의 벽은 두껍게 화강석 마름돌을 앞뒤로 쌓은 위에 내외 겹으로 여장(女墻)을 돌리고 여장에는 총안(銃眼)을 만들었으며 옹성 위로는 파수꾼이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석축위에는 누각 주변으로 여장을 벽돌로 쌓고 양측에는 작은 일각문 형식의 협문을 하나씩 두어 누각에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주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창방과 평방을 걸고 공포(栱包)를 짰다. 공포는 하층은 내3출목, 외2출목이며 상층은 내외 모두 3출목이다. 그 형식은 조선 말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데 살미[山彌]가 뾰족이 외부로 뻗어나와 수서[垂舌]와 앙서[仰舌]로 되어 있고, 내부의 살미 끝이 운공(雲工)으로 되었으며, 기둥 위에 안초공(安草工)을 두고 있다.
가구(架構)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고 상하층의 대량(大樑)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고 맞끼어져 연결되었으며, 안쪽 네 귀퉁이에 고주를 세운 것이 그대로 연장되어 상층 우주(隅柱)를 이룬다. 상층의 평주는 하층 대량 위 중간쯤에 세워졌다.
바닥은 하층에는 중앙에만 마루를 깔고 상층은 전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벽의 하층은 모두 개방하고 상층은 사방에 판문(板門)을 달았다. 천장은 연등천장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의 각 마루에 취두(鷲頭) · 용두(龍頭) · 잡상(雜像)을 배치하였다.
흥인지문은 같은 도성 내의 숭례문(崇禮門)과 비교하여 건물의 규모나 형태는 거의 비슷하나, 남대문에 없는 옹성을 갖추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또한 남대문이 조선 초기의 양식적 특성을 갖추고 있는 데 비하여,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시대적 변천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