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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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과 국방을 위하여 수상에서 전투를 담당하던 군대.
내용 요약

수군은 치안과 국방을 위하여 수상에서 전투를 담당하던 군대이다. 고려 때까지 육상군대를 보조하는 군대였다. 당나라와 전쟁에서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수군을 동원한 기록으로 보아 수군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병선군(兵船軍)을 관장하는 사수시(司水寺)와 해상경비를 필요로 한 곳에 선병도부서(船兵都部署)를 설치하였지만 법제적 수군 제도가 확립되지는 못하였다. 고려말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기선군(騎船軍) 또는 선군(船軍) 등 수군을 설치하였다.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군액(軍額)·병선(兵船)·각포설진(各浦設鎭) 등에 대한 제도를 정비하였다.

목차
정의
치안과 국방을 위하여 수상에서 전투를 담당하던 군대.
내용

고려 때까지만 하더라도 제도적 장치가 확립되지 않았으며, 육상군대를 보조하는 군대였다. 수군의 기원은 기록을 통해 보면 위씨조선(衛氏朝鮮) 때부터이다. 이 때 한나라의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이 제(齊)나라 군사 7천명을 거느리고 지금의 산둥반도를 떠나 발해(渤海)를 건너 열구(列口, 大同江)에 이르러 왕검성을 치다가 패배하였다. 이것을 보면, 한나라에서 수군을 동원했고, 위씨조선에도 이에 대비한 수상방위력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수상방위력은 곧 수군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누선장군이라 함은 한나라가 월(越)을 치기 위해 큰 배를 만들고 그 위에 누(樓)를 세움으로써 이름한 것으로, 누선군은 곧 수군을 말하는 것이다.

고구려에도 수군 존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평양 천도 전후 바다를 통해 중국의 남조(南朝) 여러 나라 및 일본 등지와 활발히 외교활동을 전개한 점으로 보아, 해상활동을 보호 · 지원하는 수군이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욱이 598년 수나라의 문제(文帝)는 수륙군 30만명으로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수군은 산둥반도를 떠나 평양성을 향하던 도중 폭풍을 만나 많은 손해를 입고 되돌아갔다. 612년(영양왕 23) 양제(煬帝)가 친히 육군 113여 만으로 공격할 때에도, 내호아(來護兒)로 하여금 수군으로 치게 했는데, 평양성과 약 60리 떨어진 곳에서 고구려군의 복병작전(伏兵作戰)에 말려들어 거의 섬멸당하고 되돌아간 자는 겨우 몇천명에 불과하였다.

이렇게 위씨조선 이래 중국의 군사행동에는 육군과 함께 반드시 수군을 동원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구려에도 그에 대비하기 위한 수군이 있었음이 분명하고, 평양성에서 약 60리 되는 대동강 상에서의 전투도 고구려의 수군이 주축이었음이 분명하다. 수나라의 수군 동원은 양제의 제2 · 3차의 군사행동 때에도 있었다. 그리고 644년(보장왕 3)에 당나라의 태종(太宗)이 침범할 때에도 수군 4만 3천명, 전함 5백척을 동원하였다. 647년에 요동을 침범할 때에도 육군과 함께 수군을 동원하였다. 또 661년에 당나라가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고 나서 고구려를 공격할 때, 소정방(蘇定方)의 수로군(水路軍)이 대동강에서 고구려군을 무찔렀다는 기록으로 보아서도 고구려에 수상전투부대가 있었음이 입증된다.

백제는 근초고왕 이후 해로로 중국 및 일본과 교통이 잦았고, 동성왕 때에는 탐라(耽羅)를 복속시킨 것 등을 볼 때 일찍부터 수군의 설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660년 소정방이 수륙군 10만여를 거느리고 산둥반도를 출발, 백강(白江 : 지금의 백마강)으로 들어와 사비성을 점령하였다. 이 때 신라의 법민(法敏 : 태종무열왕의 태자, 이후 文武王)이 병선 1백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勿島 : 지금의 덕적도)에 가서 소정방을 맞았고, 백제의 흥수(興首)가 당나라 군대의 방어책을 말하는 가운데 "당나라 군대가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기록 등은 백제에 수군이 있었음을 뒷받침해 준다. 즉, 당시 당나라 및 신라의 수군 활동이 활발했던 상황에서 백제에 수군이 없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며, 흥수의 백강 방어책은 백강을 방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군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입증된다.

신라에는 주즙(舟楫), 즉 배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선부(船府)가 있었다. 원래 주즙에 관한 일은 병부(兵部)의 대감(大監) · 제감(弟監)이 맡았으나 678년(문무왕 18)에 분리되어 새로 설치된 것이다. 이것을 볼 때 배에 관한 일이란 주로 국가적인 군사용 배의 제조 내지 통제였을 것이며, 이러한 선부의 존재는 수군의 존재를 입증해주는 것이 된다. 그리고 512년(지증왕 13) 이사부(異斯夫)가 병선을 거느리고 우산국(于山國)을 복속시켰다. 진흥왕 때 한강 유역을 확보한 뒤, 해상교통의 관문인 남양만(南陽灣)에 해상군사요지로 당항성(黨項城)을 쌓고 활발히 해상활동을 전개하였다. 660년(무열왕 7) 소정방의 수륙군을 법민이 병선 1백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서 맞았다. 이러한 사실들은 신라에 수군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특히, 신라 말기에 활발한 해외활동과 청해진(淸海鎭) 장보고(張保皐)의 해상활동 등에서 신라 수군의 활약상을 엿볼 수 있다. 장보고는 흥덕왕에게 청해 군사 1만명으로 지금의 완도(莞島)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는 한편, 중국 · 일본으로 대규모의 무역을 행해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이 청해진을 중심으로 활동한 병력이 곧 수군이었다. 진(鎭)은 군사요지가 되는 군진(軍鎭)으로 신라 말 해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해안지대에도 설치되었다. 청해진은 곧 그 가운데 하나이며, 이 외에 남양(南陽)의 당성진(唐城鎭 : 지금의 唐恩鎭)과 강화의 혈구진(穴口鎭) 등이 있으며, 이곳의 군사도 곧 수군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태봉의 수군 활동도 활발해 궁예의 부장(部將) 왕건은 903년에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금성(錦城)을 빼앗아 나주(羅州)로 이름을 고치고 군사를 주둔시킨 뒤 개선하였다. 909년에 왕건이 해군대장군(海軍大將軍)이 되어 수군을 이끌고 광주(光州) 관내의 염해현(鹽海縣)에서 견훤이 오월(吳越)에 보내는 사신의 배를 사로잡아 개선하였다. 그 해 군사 2,500명으로 후백제의 진도(珍島)와 고이도(皐夷島)를 빼앗았다. 왕건은 다시 이듬해 견훤이 나주를 위협하자, 나주 포구에서 견훤의 수군을 크게 무찌르고, 반남현(潘南縣) 포구에 이르러 해적두목 능창(能昌)을 잡아 궁예에게 보내어 목베었다. 이것은 고려가 개창되기 이전 왕건의 해상군사활동인 동시에 태봉의 수군 활동이 되는 것이다.

고려는 법제상 수군제도가 확립되지 못했으며, 다만 병선군(兵船軍)을 관장하는 중앙관서로 사수시(司水寺)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고려 말기인 1390년(공양왕 2)에 설치되었으므로, 고려왕조에는 효과를 주지 못한 무의미한 것이었다. 고려에서는 해적의 침입이 잦거나 해상경비를 필요로 한 곳에는 선병도부서(船兵都部署)가 설치되었다. 선병도부서는 일종의 수군 군단으로, 해적의 배를 무찔렀다거나 나포했다거나, 해적을 사로잡았다거나 목베었다거나, 표류민을 쇄환했다는 등의 기록이 보인다. 이것을 보면 선병도부서의 임무는 해상방어와 경비를 담당했음을 알 수 있고, 병력의 주축은 수군이었음이 분명하다.

선병도부서로는 동계(東界)의 진명(鎭溟 : 지금의 함경남도 문천)과 원흥(元興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에 있었고, 북계(北界)의 통주(通州 :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와 압강(鴨江 : 지금의 압록강)에 있었으며, 남해지방에 동남해선병도부서가 있었다. 관직으로는 선병별감(船兵別監) · 사(使) · 부사(副使) · 판관(判官) 등을 두었는데 일정하지 않았다. 선병도부서는 항시적인 것이 아니고 필요에 따라 일정 기간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계 · 북계의 그것은 각각 병마사의 지휘를 받은 것 같고, 남해의 그것은 안찰사(按察使)의 지휘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수군제도가 법제적으로 확립되지는 못했지만 군사활동은 활발하였다. 고려 전기에 동해안지역에 자주 침입한 동여진(東女眞)의 해적을 동계의 선병도부서의 수군이 쳐부수어 많은 공을 세웠고, 북계의 선병도부서의 수군은 거란(契丹) 등 외적이 압록강 등을 도하할 때 큰 타격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예종윤관(尹瓘)의 여진정벌 때에도 동계의 선병도부서 수군 2,600명이 도린포(道麟浦)에 출정해 활약하였다.

또 1275년(원종 15) 몽고와 함께 일본을 정벌할 때, 고려 군사 5,300명, 병선 9백척과 그에 따른 초공(梢工) · 수수(水手)가 참전했는데, 초공 · 수수는 전투원으로서의 기능을 가진 수군이었을 것이다. 1281년(충렬왕 7) 제2차 일본정벌 때에도 몽고의 요구로 병선 9백척, 초공 · 수수 1만 5천명, 정군(正軍) 1만명, 군량 11만석을 준비했고 실제 출정에서도 그 수와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의 초공 · 수수도 수군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 말기 왜구는 해안지대는 물론 내륙지대에 걸쳐 약탈 · 살인 · 방화를 자행했는데, 이들 왜구에 대해 나세(羅世)최무선(崔茂宣)은 전함을 이끌고 진포(鎭浦 : 지금의 금강 입구)에 이르러 왜선 5백여 척을 격파하였다. 또한 수군양성을 주장하던 정지(鄭地)는 해도원수(海道元帥)가 되어 진포 · 군산도(群山島) 등에서 왜선을 쳐부수었고, 관음포(觀音浦 :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에 이르러 왜선을 크게 격파하였다. 박위(朴葳)는 병선 1백척으로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해 왜선 3백척을 불사르는 등 큰 전과를 거둔 것 등을 보면 고려 말기에 수군 활동이 매우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고려 후기의 기록에는 선병도부서의 활동이 전연 보이지 않고 있는데, 고려 후기에는 선병도부서의 제도는 폐지된 것 같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재건된 수군은 연해(沿海)의 각 포(浦)에 복무하던 병종으로, 기선군(騎船軍) 또는 선군(船軍)으로도 불리었다.

세종 때에 수군은 군액(軍額) · 병선(兵船) · 각포설진(各浦設鎭) 등의 규모와 편제로 보아 일단 제도상으로 정비되었다. 해군인 수군은 육군인 정병(正兵)과 더불어 양인층(良人層)의 주된 의무병종이었다. 1475년(성종 6)의 통계에 의하면, 총군병 14만 8849명 중 수군이 4만 8800명, 정병이 7만 2109명이었다. 수군은 연해민(沿海民)만 아니라 산군인(山郡人)도 충원되었다. 수군 중에 진무(鎭撫) · 지인(知印) · 영사(令史) · 사관(射官) · 영선두목(領船頭目) 등은 격군(格軍)보다 우대를 받았다.

수군의 번차(番次)는 ‘2번 1삭상체(二番一朔相遞)’로서 1개월 교대로 1년에 6개월 복무이며, 정병은 ‘8번 2삭상체(八番二朔相遞)’로서 1년에 3개월 복무로 규정되었다. 따라서 수군의 역은 정병에 비해 제도상으로도 배나 무거운 부담이었다. 당초 수군은 호수(戶首)봉족(奉足)이 서로 바꾸어 입번(立番)할 수 있었으나 규제가 강화되어 호수만 입번하게 되었고, 대립방지책(代立防止策)으로 칠원목패(漆圓木牌)를 사용하게 하였다.

수군은 입번할 때 군량을 짊어지고 부방(赴防)해 선상(船上)에서 근무하며, 둔전(屯田) · 어염(漁鹽) · 해산채취(海産採取) · 병선수리(兵船修理) · 조운(漕運) · 축성(築城) 등의 잡역(雜役)에 동원되었다. 이 외에 요역(徭役)공물(貢物) · 진상(進上)의 비납(備納)까지도 부담하였다. 성종 때부터 대립(代立)과 방군수포(放軍收布)가 일반화되면서 수군의 무거운 역은 대립가(代立價)의 과중한 부담으로 변모되었다. 조정에서는 수군의 역이 과중하므로, 수군에게 수직(受職, 주로 影職)을 후히 하고, 복호(復戶)의 혜택을 주며, 부자완취(父子完聚)도 배려하였다. 그러나 역이 무거운 수군을 꺼려 양인 중 세력 없는 자만 수군에 충원되더니, 성종 때에 수군의 세전(世傳)이 규제되고 천역(賤役)으로 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칠반천역(七般賤役)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조선 후기에 수군이 부족했으므로 숙종 때에 수군의 강화를 위해 수군속오법(水軍束伍法)을 실시하였다. 수군속오법은 양인 · 천인을 혼성해 종래 좌우령(左右領)이 서로 바꾸어 입번한 2교대에서 3영(領)으로 나누어 3교대함으로써 복무기한을 완화한 것이다. 수군의 편제는 조선 초에 각 포진(浦鎭)마다 수군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 · 수군도첨절제사(水軍都僉節制使) · 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 등을 두었다. 세종 때 수군도절제사가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安撫處置使)가 되었으며, 휘하에 도만호(都萬戶) · 만호(萬戶)가 있었다. 『경국대전』에는 진관제(鎭管制)에 따라 주진(主鎭)에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거진(巨鎭)에는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제진(諸鎭)에는 만호가 배속되어 있었다.

원래 수군은 해상근무가 원칙이었으나 병선 관리와 고달픈 훈련 때문에 성종 때부터 진에 성보(城堡)가 설치되었다. 이것은 수군의 해상근무 원칙이 무너지고 육상근무로 바뀌게 되면서, 수군과 정병과의 구분이 모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종 때에는 방왜육전론(防倭陸戰論)이 주장되었으니 곧 왜는 수전을 잘하며 조선은 기병(騎兵)이 잘 싸우기 때문에 장기(長技)인 육군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방왜육전론의 대두로 수군이 허실화되자 왜구의 침입이 더욱 심해졌다. 이에 삼포왜란(三浦倭亂) 후 경상도 수군에게만 실시되었던 연합방위체제가 전라도로 확대되더니 마침내 수군 · 육군이 모두 제승방략(制勝方略)으로 방위체제를 바꾸게 되었다. 진관체제는 도를 단위로 하는 지역방위체제이며, 제승방략은 유사시에 진관의 지휘관이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본진(本鎭)을 떠나 배정된 방어지역으로 가서 싸우는 분군법(分軍法)을 말한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발해 육군은 패전을 거듭했으나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거느린 수군이 도처에서 승전해 제해권을 잡아 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순신이 해전마다 승리한 전술적 원인은 그가 해역의 지리에 밝고 거북선이라는 전함을 가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배 위에서 발사하는 대형 화포(勝字銃筒 등)의 우수성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중 1593년에 통제영(統制營)을 설치해 경상 · 전라 · 충청 3도의 수군을 통제사(統制使)로 하여금 지휘하도록 하여 남해안 방어를 강화하였다.

이어 1627년(인조 5)에는 후금(後金)과의 전쟁상태에 직면하자, 수도권 방위를 위해 강화에 통어영(統禦營)을 두어 경기 · 황해의 수군을 통솔하게 하였다. 왜란과 호란을 겪는 과정에서 통제영과 통어영이 신설됨에 따라 연합훈련이라 할 수조(水操)가 대규모로 행해졌다. 조선 후기의 수조는 각 도 수사(水使)가 주관하는 도수조(道水操)와 통제 · 통어사가 주관하는 합조(合操)로 구분된다. 도수조는 수사 예하의 각 진 · 포(鎭浦) 수졸(水卒)과 병선을 징발해 해전에 필요한 제반훈련을 실시했고, 합조는 통제사가 경상 · 전라 · 충청의 수군을, 통어사가 경기 · 황해의 수군을 수조규식(水操規式)에 따라 훈련을 실시하였다. 수조에는 2월에 실시하는 춘조(春操)와 8월의 추조(秋操)가 있는데, 춘조는 합조(合操), 추조는 도조(道操)가 되는 것이 관례였다.

수군의 가장 중요한 장비는 병선(兵船)이었다. 초기에는 해전을 위한 병선과 조운을 위한 조운선이 구별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병선으로 대선(大船) · 중선(中船) · 쾌선(快船) · 맹선(猛船) · 왜별선(倭別船) · 중맹선(中猛船) · 추왜별맹선(追倭別猛船) · 별선(別船) 등이 보이나 각 병선의 형태나 대소에 대한 기록은 없다. 세조 때 중국 · 일본 · 유구 등의 선체(船體)를 참조, 병선 · 조운선을 겸용하는 병조선(兵漕船)을 시험해 맹선제(猛船制)를 마련하였다.

『경국대전』에는 각 도 각 포별로 대 · 중 · 소맹선(大中小猛船)으로 나누어 배치하였고, 전국의 병선수는 대맹선 81척, 중맹선 195척, 소맹선 461척으로 합계 737척이다. 각 병선의 승선 인원은 대맹선 80명, 중맹선 60명, 소맹선 30명이었다. 그 중에서 무군선(無軍船)을 제외한 대 · 중 · 소맹선의 승선 인원과 그 척수를 곱하면 2만 4400명으로 수군의 총수 4만 8,800명의 반이 되며, 그것은 수군의 2번교대와도 부합된다.

명종판옥선(板屋船)이 개발되어 임진왜란 때 판옥선과 거북선[龜船]으로 왜의 수군을 제압하였다. 거북선은 이미 조선 초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임진왜란 때 판옥선의 갑판을 활모양으로 하여 가운데가 높은 것이 거북선이다. 그 뒤 병선의 편제는 대형 병선인 전선(戰船) · 거북선, 중형 병선인 방선(防船) · 병선(兵船), 소형 병선인 사후선(伺候船)을 적절히 배합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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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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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의 수군」(이재, 『한국사연구』5, 1970)
「고려의 수군제도」(김남규, 『고려군제사』, 육군본부, 1983)
「조선시대해방사(海防史)연구」(장학근, 단국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86)
「조선초기수군제도사연구」(방상현, 경희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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