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 지리지에 쾌선은 경기도의 좌도수군첨절제사영에 10척, 우도수군첨절제사영에 9척, 강화도의 정포만호영(井浦萬戶營)에 11척, 충청도의 수군도안무처치사영(水軍都安撫處置使營)에 4척 등 모두 34척이 나타나 있다.
왜구에 대하여 쾌선이 이용되기는 고려 말기부터인데, 우왕 7년(1381) 육전에서 패하여 작은 배를 훔쳐 가지고 달아나는 적을 나공언(羅公彦)이라는 자가 쾌선을 가지고 따라잡아 모두 섬멸한 일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태조 3년(1394)에 경기도의 각 포구를 지키기 위하여 큰 배를 요로에 분박, 대기시킨 뒤 쾌선에 정예한 군사를 태우고 여러 섬을 수색하여 따라잡도록 한 일이 있고, 태종 3년(1403)에는 전함은 무거워서 운용하기가 어려우니 각 도에 명령하여 경쾌한 작은 배를 10척씩 만들어 왜구를 뒤쫓아 가서 잡도록 한 일이 있다.
태종 9년 일본 해적선 14척이 황해도에 나타났을 때에 경쾌선으로 하여금 적선을 추포하게 하였고, 세종 2년(1420) 11월에는 쾌선 3척을 시험하여 왜선보다 빠르다는 것을 확인한 바 있다.
조선 초기에 쾌선을 중용하고자 여러모로 시도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으며, 『세종실록』 지리지에 있는 34척은 모두 수도권의 방위를 위하여 경기 일원에 배치되어 있을 따름이다. 100여년 후 중종 5년(1510) 삼포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6, 7명 내지 10여명으로 운용되는 쾌선이 쓰인 일이 있으나, 그 뒤로도 군선으로 중용되지는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