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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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전시 적이 배에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뱃전에 단창(短槍) 또는 단검을 꽂아 만든 군선(軍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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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접전시 적이 배에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뱃전에 단창(短槍) 또는 단검을 꽂아 만든 군선(軍船).
내용

고려 전기에 사용되었던 이 배는 당시 동북지방(지금의 함경도)에 침입해오는 여진해족(女眞海族)을 방비하는 데 쓰였다.

고려시대 함흥·홍원·북청 등지에 산거하던 일부 여진족들이 현종 때부터 숙종 때 이르기까지 약 1세기 동안 해로를 통하여 덕원·강릉·삼척·영일·경주 등지의 동해연안 일대에 자주 침입해왔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조정에서는 진명(鎭冥:지금의 德源)·원흥진(元興鎭:지금의 定平) 등지에 선병도부서(船兵都部署, 또는 都部署)라는 해군기지를 두고 과선을 배치하여 여진해족을 방비하게 하였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1009년(현종 즉위년) 과선 75척을 만들어 진명에 머무르도록 하여 동북해족을 방어하게 하였고, 때로는 귀화한 여진족들이 과선을 헌납해온 일도 있었다.

과선은 이미 서기전 춘추전국시대와 한나라의 기록에 나타나는 군선으로서, 창과 방패를 소지한 군사가 타고 있는 배라는 설과 선체에 창을 설치한 배로 보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런데 고려의 과선은 뱃전에 짧은 창검을 꽂았는데, 이는 11세기 동북지방에 침입해온 여진해족이 수전(水戰)에 능해 한꺼번에 20∼30명 또는 50∼60명씩 힘을 뽐내며 배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이러한 적들을 막기 위하여 과선 같은 배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크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1019년 여진해족에 납치되었다가 고려 수군에게 구출되어 일본에 송환된 일본 여인 내장석녀(內臟石女) 등이 고려수군의 전투상황을 진술한 <소우기 小右記>에 의하면 “고려 군선의 선체는 높고 크며 무장이 많고, 배 안은 넓고 크다.”라고 하였고, 또한 “배 안은 넓고 크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고려선은 과선이며 이로써 고려의 과선은 상당히 큰 배였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선면(船面)이 철로써 각을 만들어 적선을 받아 깨친다.”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철로 만든 램(ram, 衝角)을 장비하였던 것 같은데, 서양선에서 철로 만든 램은 아주 후세의 군함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과선은 후세에 그대로 전해내려오지는 않았지만, 고려 말과 조선 초 왜구방비용으로 쓰인 것으로, 뱃전에 1자 가량의 창검을 꽂아놓아 적이 배에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한 검선으로 전통이 이어졌다.

다만, 검선은 대형 주력함이 아니고 소형 특수선으로서 소형 과선이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활용된 거북선도 개판 위에 칼송곳을 빈틈없이 꽂아놓았는데 적의 침입을 방지한 방법은 바로 이 과선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고려사』
『고려사절요』
『세종실록』
『고려시대사』(김상기, 동국문화사, 1961)
『한국선박사연구』(김재근,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4)
「신안침몰선의 선체구조에 대하여-고려의 선박-」(김재근, 『학술원논문집 인문사회과학편』 20, 1981)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4-3(Needham,J., Nautical Tech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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