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검선(槍劒船)이라고도 하며, 고려 말·조선 초에 군선으로 사용되었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1377년(우왕 3) 손광유(孫光裕)가 왜구와 싸우다가 흘러가는 화살에 맞아 검선을 타고 겨우 빠져나왔다는 기록이 처음 보인다.
조선 초 세종 때에는 검선 1척과 비거도선(鼻居刀船) 2, 3척을 짝지어 왜구를 격퇴하였으며, 압록강을 건너 침략하는 도둑떼를 방비하기 위하여 요해처에 검선 2, 3척씩을 배치해놓았으며, 일본인이 자주 드나드는 포구마다 창검선을 비롯하여 중대선(中大船)·맹선(孟船)·추왜선(追倭船) 등에도 창검을 꽂아놓고 무위(武威)를 시위하기도 하였다.
검선은 칼을 빼들고 배 안으로 뛰어드는 왜구의 전술방식에 대응해 창안된 배로서, 고려시대의 과선(戈船), 조선시대의 거북선과 그 맥을 같이한다. 다만, 과선과 거북선은 대형 군선인 데 비해, 검선은 15명 정도가 탈 수 있는 작은 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