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룻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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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터에서 사람이나 짐 등이 이동할 때 사용되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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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터에서 사람이나 짐 등이 이동할 때 사용되는 배.
내용

진선(津船)이라고도 하며, 관선(官船)과 사선(私船)의 구별이 있었다. 전국의 하천 중에서도 특히 경강(京江)에는 각처에 나루터[津渡]와 나룻배를 두고 그것을 적절히 관리했다.

조선시대 한강의 경우를 보면 상류에서부터 하류로 내려오면서 도미진(渡迷津)·광나루[廣津, 또는 廣壯津]·삼전도(三田渡)·중량포(中梁浦, 또는 涑溪)·서빙고(西氷庫)·흑석진(黑石津)·동작도(銅雀渡)·한강도(漢江渡)·노량진(鷺梁津)·두모주(豆毛洲, 또는 두뭇개)·용산강(龍山江)·마포(麻浦)·서강(西江)·율도(栗島, 또는 밤섬)·양화도(楊花渡)·사천(沙川, 또는 모래내)·공총진(孔叢津, 또는 孔巖津)·조강도(祖江渡) 등 도성으로 통하는 나루터가 있었다.

이들 경강의 각 진도에는 책임관원인 도승(渡丞)을 비롯한 각급 진리(津吏)와 진선을 배치했다. 한강도에는 도승 1인을 배치해 도성 출입을 살피며 강물의 깊이도 측량하고, 나룻배가 많을 때에는 관선 15척과 사선을 두었다. 양화도에는 도승 1인과 관선 9척, 사선을 두고 15척의 참선(站船)을 배치한 일도 있었다.

광나루에는 도승을 배치해 도성 출입을 살피며, 경기좌도의 수참판관(水站判官)을 겸하도록 해 조운(漕運)까지도 관장하게 하며 관선 4척을 배치했다. 나룻배의 정확한 크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관선과 사선이 모두 『경국대전』 공전(工典) 주차조(舟車條)에 규제된 수운제도선(水運諸渡船) 중 강선(江船)의 크기가 기준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곡물을 실을 경우에 각각 250석, 200석, 130석을 적재할 수 있는 크기였다. 사선 한 척에 100여 명을 태우고 가다가 사고가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나룻배에 탈 수 있는 사람의 인원수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룻배의 구조는 여느 강선과 같이 평탄한 저판(底板)을 중심으로 전후좌우에 외판(外板)과 선수재·선미재를 서로 고착한 평저선(平底船)의 형태이다. 또한 건조 후 5년에 수리를 하고, 10년에 다시 신조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나루터와 나룻배 경비의 염출은 뱃사공에게는 관둔전(官屯田)·마전(馬田)·빙부전(氷夫田)·수릉군전(守陵軍田) 등과 같은 조건으로 진부전(津夫田)을 급여해, 자신이 직접 경작하거나 예속된 노동력을 사용해 경작하게 하고, 나룻배를 신조하는 경우의 선재(船材)는 군선 아니면 조운선 등 관유선의 퇴재(退材)를 물려받아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사선의 경우에는 일정한 선임을 받아 경비에 충당했다.

참고문헌

『경국대전』
「경강진도선에 대하여」(이현종, 『향토서울』27,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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