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 조운선이나 군선 등에 탑승하여 노를 젓거나 뱃일을 맡아보던 운항 담당자.
이칭
이칭
선군(船軍), 조전선군(漕轉船軍), 조졸(漕卒)
제도/법령·제도
시행 시기
고려시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수수(水手)는 고려시대에 조운선이나 군선 등에 탑승하여 노를 젓거나 뱃일을 맡아보던 운항 담당자이다. 선장인 초공(梢工)과 함께 배의 운항을 담당하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고려 말기, 왜구 침입 시기에는 선군(船軍) 등으로도 불렸으며, 조선 건국 후에는 조졸(漕卒)과 수군(水軍)으로 분화되었다.

정의
고려시대, 조운선이나 군선 등에 탑승하여 노를 젓거나 뱃일을 맡아보던 운항 담당자.
제정 목적

고려 정부는 국초부터 해군 지역에 12개(문종 이후에는 13개)의 조창을 설치하고, 조운선을 마련하여 지방에서 징수한 조세를 개경으로 운송하였다. 고려 정종(靖宗, 재위 1034∼1046) 때 마련된 규정에 따르면 바닷가의 조창에는 1000석을 적재할 수 있는 초마선이 각 6척씩 배정되었으며, 한강 상류에 자리잡은 덕흥창흥원창에는 200석을 적재할 수 있는 평저선이 20~21척씩 배정되어 있었다. 조운의 관리와 운항을 위하여 조창의 사람들에게 특수한 역을 부여하면서 초공(梢工), 수수(水手), 잡인(雜人) 등의 역할이 등장하게 되었다.

내용

조운은 지방에서 거둔 조세를 경창까지 운송하는 일을 일컫는 말이다. 조운에 이용하는 선박을 조운선이라고 하였는데, 조운선에는 초공, 수수, 잡인이 승선하였다. 초공은 사공(沙工)으로도 불리었는데, 초공은 배의 키와 돛을 조절하며 실질적인 운송 책임을 맡았던 선장이고, 수수는 노를 젓는 노꾼이었으며, 잡인은 배에서의 허드렛일을 담당한 사람들이었다.

『고려사』 식화지에 따르면 정해진 기한 내에 출발하였으나 바람이 순조롭지 못하여 초공 3명 이상, 수수와 잡인 5명이 미곡과 함께 침몰한 때에는 조세를 다시 징수하지 않았지만 정해진 기간보다 늦게 출발하여 초공과 수수 및 잡인의 1/3 이하가 빠져 죽으면 그 고을의 관리, 향리, 초공, 수수 등에게 잃은 곡식을 나누어 징수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을 볼 때 이들은 단순히 노를 젓기만 한 것이 아니라 초공과 함께 조세 운송의 책임까지 지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들의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명확히 남아 있는 자료가 없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상황을 고려하면 초마선에는 각각 초공이 1명, 수수와 잡인이 15~20명, 평저선에는 초공이 1명, 수수와 잡인이 5명 내외로 승선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사항

고려 후기에 수수는 원나라가 삼별초를 진압하거나 일본으로 원정할 때 동원되었다. 1272년(원종 13)에 제주도의 삼별초를 진압하는 데 동원된 수수는 3,000명이었고, 1274년(원종 15) 10월에 여몽연합군의 1차 일본 원정에 6,700명, 1280년(충렬왕 6) 11월에 있었던 2차 원정에 1만 5000명이 차출되었다. 이로 인해 고려의 조운 제도는 크게 동요된 것으로 보인다.

14세기 이후에는 왜구가 침입하여 조운선을 약탈하고, 수수들을 잡아가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이에 따라 수수는 왜구와 격전할 수 있는 선군(船軍) 등으로 변화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조전선군(漕轉船軍), 선군, 조졸(漕卒)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다가, 성종 이후에는 을 세습하는 대신 다른 모든 역에서 벗어나고 급료를 받는 전업적인 조졸로 굳어졌다.

의의 및 평가

수수는 조선 시대 조군의 원류가 되는 사람들로서, 고된 역과 조세 운송 중에 일어나는 침몰 사고의 책임을 져야 하는 등 역의 부담이 일반 농민들에 비해 컸다. 조선시대에 신량역천(身良役賤)이었던 조졸이 역을 기피하게 된 것도 그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성종실록(成宗實錄)』

단행본

문경호, 『고려시대 조운제도 연구』(혜안, 2014)
한정훈, 『고려시대 교통운수사 연구』(혜안, 2013)

논문

이창섭, 「고려시대 수군 연구」(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0)
한정훈, 「고려시대 전라도 조운 조창의 현황과 특징」(『한국중세사연구』 56, 한국중세사학회, 2019)
문경호, 「태안 마도 4호선 출수 유물을 통해 본 조선 초 조졸의 선상 생활」(『도서문화』 48,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2016)
한정훈, 「고려시대 안흥창과 부안 청자의 운송방식」(『도서문화』 48,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2016)
문경호, 「여말선초 조운제도의 연속과 변화」(『지방사와 지방문화』 17-1, 역사문화학회, 2014)
한정훈, 「조선 건국기 조운체제의 정비와 그 의미」(『진단학보』 120, 진단학회, 2014)
김재명, 「고려의 조운제도와 사천 통양창」 (『한국중세사연구』 20, 한국중세사학회, 2006)
최완기, 「고려조의 세곡운송」(『한국사연구』 34, 한국사연구회, 1981)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