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고려시대, 조운선이나 군선 등에 탑승하여 노를 젓거나 뱃일을 맡아보던 운항 담당자.
제정 목적
내용
『고려사』 식화지에 따르면 정해진 기한 내에 출발하였으나 바람이 순조롭지 못하여 초공 3명 이상, 수수와 잡인 5명이 미곡과 함께 침몰한 때에는 조세를 다시 징수하지 않았지만 정해진 기간보다 늦게 출발하여 초공과 수수 및 잡인의 1/3 이하가 빠져 죽으면 그 고을의 관리, 향리, 초공, 수수 등에게 잃은 곡식을 나누어 징수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을 볼 때 이들은 단순히 노를 젓기만 한 것이 아니라 초공과 함께 조세 운송의 책임까지 지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들의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명확히 남아 있는 자료가 없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상황을 고려하면 초마선에는 각각 초공이 1명, 수수와 잡인이 15~20명, 평저선에는 초공이 1명, 수수와 잡인이 5명 내외로 승선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사항
14세기 이후에는 왜구가 침입하여 조운선을 약탈하고, 수수들을 잡아가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이에 따라 수수는 왜구와 격전할 수 있는 선군(船軍) 등으로 변화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조전선군(漕轉船軍), 선군, 조졸(漕卒)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다가, 성종 이후에는 역을 세습하는 대신 다른 모든 역에서 벗어나고 급료를 받는 전업적인 조졸로 굳어졌다.
의의 및 평가
참고문헌
원전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성종실록(成宗實錄)』
단행본
- 문경호, 『고려시대 조운제도 연구』(혜안, 2014)
- 한정훈, 『고려시대 교통운수사 연구』(혜안, 2013)
논문
- 이창섭, 「고려시대 수군 연구」(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0)
- 한정훈, 「고려시대 전라도 조운 조창의 현황과 특징」(『한국중세사연구』 56, 한국중세사학회, 2019)
- 문경호, 「태안 마도 4호선 출수 유물을 통해 본 조선 초 조졸의 선상 생활」(『도서문화』 48,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2016)
- 한정훈, 「고려시대 안흥창과 부안 청자의 운송방식」(『도서문화』 48,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2016)
- 문경호, 「여말선초 조운제도의 연속과 변화」(『지방사와 지방문화』 17-1, 역사문화학회, 2014)
- 한정훈, 「조선 건국기 조운체제의 정비와 그 의미」(『진단학보』 120, 진단학회, 2014)
- 김재명, 「고려의 조운제도와 사천 통양창」 (『한국중세사연구』 20, 한국중세사학회, 2006)
- 최완기, 「고려조의 세곡운송」(『한국사연구』 34, 한국사연구회, 1981)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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