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원연합군 ()

고려시대사
개념
삼별초 항쟁을 진압한 뒤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동원된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 여몽연합군.
이칭
이칭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
내용 요약

여원연합군은 삼별초 항쟁을 진압한 뒤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동원된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이다. 여몽연합군이라고도 한다. 몽골과 강화를 체결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삼별초는 진도와 제주도를 거점으로 대항하였다. 고려 조정은 삼별초를 진압하기 위해 원과 연합군을 결성하여 삼별초를 진압하였다. 이후 고려는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원나라는 일본정벌을 위해 다시 여원연합군이 조직하여,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 일본정벌을 시도하였다. 두 차례 정벌은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어 실패하였고, 1294년 일본정벌 계획은 중단되었다.

정의
삼별초 항쟁을 진압한 뒤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동원된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 여몽연합군.
개설

1273년(원종 14) 삼별초가 진압된 뒤 고려는 원나라의 요구에 의해 1274년(충렬왕 즉위)와 1281년(충렬왕 7) 두 차례에 걸쳐 연합군을 이루어 일본정벌에 나섰으나 폭풍우를 만나 많은 희생자를 내고 돌아왔다. 다만 몽골은 1271년 11월에 국호를 원(元)이라고 하였으므로, 진도의 삼별초를 진압할 때 고려와 몽골 군사는 여몽(麗蒙)연합군으로 불리지만, 이후 탐라의 삼별초를 정벌할 때부터는 여원연합군이라고 한다.

연원 및 변천

1231년(고종 18) 몽골 군사가 고려를 침략하였다. 이듬해 고려 조정을 장악하였던 무신정권의 최우(崔瑀)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대몽항쟁을 주도하였다. 항쟁은 뒤이어 최항(崔沆), 최의(崔竩)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1258년 최의가 김준(金俊)에게 살해되면서 정치적 실권은 국왕에게 돌아갔고, 국왕은 몽골과 강화를 추진하였다. 1259년(고종 46) 고종은 태자 왕전(王倎, 뒤의 원종)을 몽골에 보내 강화의 뜻을 표하였고, 항쟁을 단념한다는 표시로 강화의 외성과 중성을 허물어 버렸다.

하지만 무신들은 몽골과의 강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김준을 살해한 임연(林衍)은 노골적으로 반대하며 1269년에 원종을 폐위하고 동생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세웠다. 이때 몽골에 인질로 가 있던 태자 왕심(王諶, 뒤의 충렬왕)이 귀국 도중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듣고서 몽골에 원군을 요청하고 임유무(林惟茂)를 압박하여 원종이 복위하도록 하였다. 그 뒤 원종은 더욱 몽골과의 관계 개선에 노력하여 몽골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는 대가로 군사를 요청하면서 태자와 원나라 공주의 혼인을 꾀하였다. 이로써 고려 조정에 대한 몽골의 영향력은 점차 커져 갔다.

1270년(원종 11) 왕실이 수도를 개경으로 다시 옮겼는데, 이 때 장군 배중손(裵仲孫)이 이끄는 삼별초가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국왕으로 내세우고 진도와 제주도를 거점으로 3년 동안 고려 · 원나라에 대항하였다. 1271년 5월 15일고려의 김방경(金方慶)과 몽골의 흔도(忻都, 忽敦), 홍다구(洪茶丘) 등이 연합군 3군을 인솔하여 진도에 머물고 있는 삼별초를 공격하였다. 삼별초는 김통정(金通精)을 중심으로 탐라(제주도)로 병력을 옮겨 계속 대항하였다.

하지만 1273년 4월 28일전라도 병선 1백 60척과 육 · 해군 1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탐라에 들어온 김방경, 흔도, 홍다구 등의 여원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삼별초 진압 후 1274년 5월 11일 태자 왕심이 원나라 세조의 공주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과 원나라에서 혼인하면서,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어 관계를 지속해 나갔다.

내용

원나라는 삼별초 진압과는 별도로 고려를 통해 일본을 외교적으로 복속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자 여원연합군을 조직하여 일본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1274년 10월 27일에 고려 도독사 김방경의 삼익군(三翼軍) 8천 명, 원나라 도원수 흔도가 이끄는 몽한군(蒙漢軍) 2만 5천 명은 뱃사공[梢工] · 바닷길 안내자[引海] · 노군[水手] 6천 7백 명과 함께 9백여 척으로 원정기지인 합포(合浦, 지금의 마산)를 출발하여 1차 일본정벌에 나섰다.

여원연합군은 쓰시마[對馬島] · 이키노시마[一岐島]를 점령하고 규슈[九州]의 하카타[博多]에 진격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날이 저물 무렵에 퇴각하였다. 그런데 밤중에 폭풍우가 일어나서 적지 않은 전함이 파손되거나 침몰하면서 11월 27에 귀국하였다. 이때 돌아오지 못한 군사의 수는 1만 3천 5백여 명이나 되었다.

1279년 남송의 군사를 물리친 원나라 세조는 일본정벌에 박차를 가하였다. 고려 충렬왕은 이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1280년 8월 고려에 설치된 정동행성의 우두머리에 임명되었다. 1281년 김방경의 지휘를 받은 고려군 1만 5천명, 흔도 · 홍다구 휘하의 몽한군 3만명, 남송 범문호(范文虎) 지휘 하의 강남군 10만명 등의 대규모 연합군이 편성되어 2차 일본정벌에 나섰다. 5월 3일 합포를 떠난 고려군과 몽한군은 이키노시마에서 강남군과 만나 연합작전을 펼치기로 하였다.

하지만 강남군의 지연 도착으로 군사 작전에 차질이 생긴데다가, 도착한 강남군이 태풍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따라 여원연합군은 다시 철수하였다. 원나라 세조는 두 차례의 원정이 실패하였지만, 일본정벌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원정 계획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세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1294년에 일본정벌 계획은 중단되었다.

의의와 평가

여원연합군은 삼별초로 상징되는 대몽세력을 몰락시키는 군사적 배경이었고, 충렬왕의 2차 일본정벌 관여로 고려 왕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원나라가 고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시키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편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은 원나라와 고려 조정의 필요에 의해서 진도, 탐라, 일본정벌에 두 나라 군사가 동원된 특별한 사례이자, 근대 이전에 일본정벌을 시도한 최초이며 유일한 사례이다. 일본은 당시 여원연합군이 태풍에 의해서 제대로 공격하지 못한 것을 들어, 일본을 지키는 신풍(神風, 가미가제)에 대한 신화를 강조하면서 후일 천황제를 구축하는 중요한 역사적 경험으로 강조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원사(元史)』
『쿠빌라이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이승한, 푸른역사, 2009)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정순태, 김영사, 2007)
「전기정동행성의 치폐에 대한 검토」(장동익, 『고려후기 외교사연구』, 일조각, 1994)
「삼별초와 그의 난에 대하여」(김상기, 『동방문화교류사논고』, 을유문화사, 1948)
『元寇』(旗田巍, 中央公論社, 1965)
『滿鮮史硏究: 中世篇3』(池內宏, 吉川弘文館, 1963)
『元寇の新硏究』(池內宏, 東洋文庫,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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