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경은 고려 후기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고 몽골군과 함께 일본 정벌을 지휘했던 무신이다. 1248년(고종 35) 몽골 침입 때 서북면 병마판관으로서 위도(葦島)에 입보하여 백성들을 안전하게 보호함으로써 이름이 드러났다. 1270년(원종 11)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자 몽골군과 함께 진도와 제주도를 모두 함락하여 난을 진정시켰다. 1274년(원종 15)과 1281년(충렬왕 7)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원정에 참여하였다. 안에서는 중찬으로 내정을 총괄하였고, 전쟁에 나가서는 고려왕조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김방경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본연(本然)이다.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김민성(金敏成)이며 아버지는 병부상서(兵部尙書) ·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김효인(金孝印)이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김민성이 양육했는데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다.
1229년(고종 16)에 음서(蔭敍)로 산원 겸 식목녹사(散員兼式目錄事)에 임명되면서 관직에 진출하였다. 당시 시중(侍中) 최종준(崔宗峻)이 충성스럽고 직언하는 성품을 사랑하여 큰일이 있으면 모두 김방경에게 맡겼다.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감찰어사(監察御使)에 올랐는데, 우창(右倉)을 감독할 때는 재상의 청탁이라 할지라도 거절하였다.
1248년(고종 35)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에 부임되었을 때 몽골이 침략해 오자 백성들과 함께 위도(葦島)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바닷물을 막기 위하여 제방을 쌓았고 이렇게 해서 형성된 10여 리의 평탄한 지형을 농사에 이용하여 상당한 수확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들어 우물이 없는 불편을 덜게 하니 모두 그 지혜를 칭찬하였다.
1263년(원종 4)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있을 때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유천우(兪千遇)와 대립하는 등 꿋꿋한 의지를 보여 주기도 하였으나, 상장군(上將軍)에 오른 이후 반주(班主) 전분(田份)의 미움을 사서 지방관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망이 두터웠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형부상서(刑部尙書) ·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임명되었다.
고려는 몽골과 강화(講和)를 체결한 이후에도 개경 환도를 거부하고 있었다. 1269년(원종 10) 집정자 임연(林衍)이 원종(元宗)을 퇴위시키고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새로운 왕으로 즉위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몽골의 강한 반대와 위협에 부딪쳐 다시 왕이 복위하게 되었는데, 그때 김방경은 이장용(李藏用)의 천거로 몽골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270년(원종 11) 6월 개경 환도가 강행되자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김방경은 삼별초의 공격을 받고 있던 전주(全州)와 나주(羅州)를 위기에서 구하고, 이듬해 1271년(원종 12) 몽골군 원수 흔도(忻都)와 함께 삼별초의 거점인 진도를 함락하여 삼별초를 토벌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공으로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다. 이어 탐라(耽羅: 지금의 제주도)로 들어간 삼별초의 잔여 세력을 평정하는 책임을 맡아 1273년(원종 14)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에 임명되어 원나라 장수 흔도 · 홍다구(洪茶丘)와 함께 삼별초를 완전히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시중(侍中)에 오르고 그해 가을 원(몽고)에 들어가 원 세조(世祖)의 환대를 받았다.
1274년(충렬왕 즉위년) 10월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려고 할 때 도독사(都督使)로서 도원수(都元帥) 홀돈(忽敦)의 총지휘 아래 고려군 8천 명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대마도와 이키도[壹岐島]에서 전과를 올리고 후쿠오카[福岡]에 상륙하여 일본의 방수군을 제압하였으나 철군 도중 심한 풍랑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상주국(上柱國)이 되었고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가직(加職)되었다.
이듬해에 관제의 변화에 따라 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감찰사사(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監察司事)에 임명되었으며 1276년(충렬왕 2)에는 성절사(聖節使)로서 원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277년(충렬왕 3)에 위득유(韋得儒) 등의 모함을 받고 원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 석말천구(石抹天衢)에 의해 구금되었다. 이후 홍다구에게 참혹한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거짓 자백을 하지 않았고 결국 대청도로 유배되었다.
그 뒤 다시 원나라에 이송되었는데 원 세조가 무죄를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방면되었다. 그 후 중찬(中贊)에 임명되어 수상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280년(충렬왕 6)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원나라로부터 중선대부(中善大夫) · 관령고려국도원수(管領高麗國都元帥)의 직임을 받았다. 1281년(충렬왕 7)의 제2차 일본 정벌에 주장(主將)으로 참여했으나 태풍으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병서(兵書)와 전법(戰法)에 대하여 해박하였고, 『사서삼경(四書三經)』,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대해서도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관직에 있을 때는 무인 집정자와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공정한 법 질서 및 국가의 기강을 유지하려는 현실적 대응 능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된다.
1283년(충렬왕 9)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로 치사(致仕)하였으며, 이어서 첨의령(僉議令)이 가직되고 상락군 개국공 식읍 일천호 식실봉 삼백호(上洛君開國公食邑一千戶食實封三百戶)에 봉해졌다.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에 묘소가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