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찬은 고려 후기, 첨의부(僉議府)의 종1품 관직이다. 1275년(충렬왕 1)에 관제를 개편하면서 중서문하성의 문하시중을 첨의부 중찬으로 바꾸고 우 · 좌 각 1명씩 두었다. 1298년에 충선왕이 중찬을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고쳤다가 충렬왕이 복위하면서 다시 중찬이라 하였다. 1308년에 충선왕이 중찬을 정승(政丞)으로 바꾸고 정원을 1명으로 줄였다. 1330년(충숙왕 17)에 충혜왕이 즉위하여 도첨의중찬으로 개칭하였지만 곧이어 충숙왕이 복위하여 정승으로 되돌리고 좌 · 우 2명을 두었다.
1275년(충렬왕 1)에 원나라의 강요로 고려에서는 관제를 격하하였다.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상서성(尙書省)을 합쳐서 첨의부(僉議府)로 바꾸었다. 관부 개편과 함께 소속 관직의 명칭과 직제도 고쳤는데, 중서문하성의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첨의부의 중찬으로 개정하였다.
문하시중의 정원은 1명이었는데 첨의중찬은 좌 · 우 2명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개정에도 불구하고 실례를 보면 중찬에는 계속하여 1명만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중찬을 2명으로 늘린 시기는 1296년(충렬왕 22) 5월이었다. 홍자번(洪子藩)을 우중찬으로 삼고, 조인규(趙仁奎)를 좌중찬으로 삼았다.
우중찬의 서열이 좌중찬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원나라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고려 전기 관직명에 좌 · 우가 있으면 좌를 우위에 두었는데 1291년(충렬왕 17)부터 우직을 더 상급의 직위로 정하였다. 따라서 첨의부의 우중찬이 수상이고 좌중찬은 아상이었다.
관직의 좌우 서열은 1303년(충렬왕 29) 9월에 좌직이 우직보다 앞서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뒤에도 좌우 관직 사이의 서열은 뒤바뀌는 과정을 거듭하였다. 1293년(충렬왕 19)에 첨의부가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로 개칭되면서 첨의중찬은 도첨의중찬이 되었다.
1298년(충렬왕 24)에 충선왕이 즉위하여 관제를 개정하고, 중찬을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충렬왕이 복위하면서 충선왕이 개정한 관제를 다시 이전의 것으로 환원하였다. 도첨의시중도 다시 중찬, 즉 우중찬과 좌중찬으로 명칭을 되돌렸다.
1308년(충렬왕 34)에 충선왕이 원나라에 머물며 실권을 장악하자 고려의 관제를 다시 변경하였다. 그 결과 첨의부 중찬을 정승(政丞)으로 고치고 정원도 2명에서 1명으로 줄였다. 정승은 1330년(충숙왕 17)에 왕위를 물려받은 충혜왕이 또다시 중찬으로 고쳤으며 정원은 계속하여 1명이었다. 얼마 뒤 1332년(충숙왕 후 1) 중찬을 다시 우정승과 좌정승으로 개정하였다.
충렬왕 때 중찬을 역임한 인물로는 김방경(金方慶), 원부(元傅), 허공(許珙), 홍자번(洪子藩), 조인규(趙仁規), 정가신(鄭可臣), 김혼(金琿), 송분(宋玢), 한희유(韓希愈), 최유엄(崔有渰) 등이 있고 충혜왕 때 도첨의중찬의 직에 김심(金深)이 임명되었다.
중찬은 첨의부의 수상으로 정치 실무를 맡은 관료 및 신료 중에 최고위직이었다. 그 전신인 문하시중은 보통 판이부사(判吏部事)를 겸하였다. 그를 계승한 중찬도 대체로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 겸하였다. 수상으로서 중찬은 국왕을 상대하거나 중요 국정에 관한 논의를 주관하는 의정 기능을 맡아보았다.
1332년에 중찬을 좌우정승으로 개칭한 뒤 공민왕 때 그 명칭과 서열이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1354년(공민왕 3), 좌우정승을 시중으로 고치고, 얼마 뒤 다시 좌정승 · 우정승으로 개칭하였다. 1356년(공민왕 5) 반원개혁정치를 펴면서 관부의 명칭을 중서문하성으로 되돌렸다. 이와 함께 우정승을 문하시중으로 좌정승을 문하수시중(門下守侍中)으로 개정하였다.
1362년(공민왕 11), 다시 관부를 도첨의부로 바꾸고 문하시중‧수시중을 첨의우정승 · 첨의좌정승이라 고쳤다. 이듬해(1363년) 또다시 첨의좌시중과 우시중을 두었다. 1369년(공민왕 18), 도첨의부를 문하부로 개칭하면서 첨의좌‧우시중을 문하좌시중 · 문하우시중으로 개칭하였다. 창왕 때에는 다시 문하시중 · 문하수시중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