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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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 도첨의부에 소속된 관직.
제도/관직
설치 시기
고려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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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소속
도첨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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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우정승은 고려시대 도첨의부에 소속된 관직이다. 고려 전기 중서문하성의 종1품 관직인 문하시중의 후신으로, 충숙왕 대 도첨의부에 속한 관직이다. 백규서무와 간쟁봉박을 관장하는 중서문하성(뒤의 도첨의부)의 장관직으로, 서열이 가장 높은 재신이었으며 일종의 수상이었다.

정의
고려시대, 도첨의부에 소속된 관직.
임무와 직능

정사를 총괄하는 벼슬로 여러 정무를 담당하는 백규서무(百揆庶務)와 임금에게 옳지 못한 일을 말하고 부당한 명령을 돌려 보내는 간쟁봉박(諫諍封駁)을 관장하던 고려의 최상위 정무 기구인 도첨의부(都僉議府)의 장관직이다.

변천사항

원래 국초에 내의성(內議省)을 두었다가 982년(성종 1)에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으로 고치고, 장관으로 종1품의 내사령(內史令)문하시중(門下侍中)을 두었다. 1061년(문종 15)에 이를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으로 고치면서 내사령을 중서령(中書令)으로 고치고 문하시중은 그대로 두었다. 이중 중서령은 일종의 명예직으로 기능하면서 문하시중이 실질적인 중서문하성의 장관이자 수상으로서 자리매김하였다.

1275년(충렬왕 1)에 몽골(원)의 영향으로 중서문하성을 상서성(尙書省)과 병합하여 첨의부(僉議府)로 개편하게 되면서, 그 장관으로 좌우(左右)의 첨의중찬(僉議中贊) 각 1인을 두었다. 뒤이어 이를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로 고쳤다.

1298년(충선왕 즉위년)에 충선왕(忠宣王)이 왕위에 올라 개혁정치를 하면서 첨의중찬을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고쳤다가 중찬(中贊)으로 고쳤으며, 1308년(충선왕 복위 1)에 충선왕이 복위하면서 중찬을 정승(政丞)으로 다시 고치면서 1인을 줄여 1인으로 하였다. 충혜왕(忠惠王)이 다시 중찬으로 바꾸었으나, 그 뒤에 우정승과 좌정승(左政丞)으로 개편하였다. 이것은 1332년(충숙왕 복위년)으로 생각되는데, 몽골(원)의 영향으로 우정승이 좌정승보다 서열이 높았다.

1354년(공민왕 3)에 이를 시중(侍中)으로 고쳤다가 다시 우정승과 좌정승으로 고쳤으며, 1356년(공민왕 5)에 공민왕(恭愍王)이 몽골(원)의 영향에서 벗어나려 하면서 다시 시중으로 고쳤다가 1362년(공민왕 11)에 첨의우정승(僉議右政丞)과 첨의좌정승(僉議左政丞)으로 고쳤다.

1369년(공민왕 18)에 도첨의부(都僉議府)를 문하부(門下府)로 고치면서 이를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과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으로 고쳤고, 창왕 때 이를 시중과 수시중(守侍中)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박용운, 『고려시대 중서문하성 재신 연구』 (일지사, 2000)
박용운, 『『고려사』 백관지 역주』 (신서원, 2009)
변태섭, 『고려정치제도사연구』 (일조각, 1971)

논문

이정훈, 「원간섭기 첨의부의 위상과 역할」 (『역사와현실』 88, 한국역사연구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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