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 1330년∼1332년, 복위 1339년∼1344년. 이름은 왕정(王禎), 몽골명은 보탑실리(普塔失里, 부다시리). 충숙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洪氏)이다. 비(妃)는 원(元) 관서왕(關西王) 초팔(焦八)의 딸인 덕녕공주(德寧公主: 충목왕의 생모)와 찬성사(贊成事) 윤계종(尹繼宗)의 딸 희비(禧妃) 윤씨(尹氏), 평리(評理) 홍탁(洪鐸)의 딸 화비(和妃) 홍씨(洪氏), 상인(商人) 임신(林信)의 딸 은천옹주(銀川翁主) 임씨(林氏)이다.
1315년(충숙왕 2) 출생하여, 1328년(충숙왕 15) 세자로서 원에 가서 숙위(宿衛) 생활을 했다. 당시 원의 황위 계승 분쟁에서 문종(文宗)을 옹립하며 권력을 장악한 권신 연첩목아(燕帖木兒, 엘테무르)와의 관계를 배경으로, 충숙왕의 전위(傳位)를 받고 1330년(충숙왕 17)에 귀국해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 고려에 유배 와 있던 명종(明宗)의 장자 타환첩목이(妥懽帖睦爾, 토곤테무르, 뒤의 순제)와 관련해서 발생한 반역 모의에 연루되어 1332년(충숙왕 복위1) 폐위되어 원으로 소환되었다. 원에서 숙위 생활을 하면서 방탕하게 생활한 것이 문제가 되어 1336년(충숙왕 복위5) 귀국 조치되었다.
1339년(충숙왕 복위8) 3월, 충숙왕이 충혜왕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사망했으나, 원 측에서 이를 승인하지 않는 가운데 충혜왕의 왕위 계승은 지연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같은 해 8월, 충혜왕이 충숙왕비인 경화공주를 간음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충숙왕이 사망한 후 심왕을 옹립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좌정승(左政丞) 조적(曺頔)은 공주로부터 이를 듣고 병력을 모아 충혜왕을 공격하였다. 조적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충혜왕은 원으로 압송되어 형부(刑部)에 수감되었다. 당시 충혜왕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권신 백안(伯顔, 바얀)이 실각하고 탈탈(脫脫, 톡토)이 집권하게 되는 원의 정국 변동 속에서 충혜왕은 1340년(충혜왕 복위1) 3월, 석방되어 원으로부터 왕위의 계승을 인정받아 다시 왕위에 올랐다.
충혜왕은 측근 세력을 양성하고 시위 부대를 양성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 측근에는 군소(群小) 혹은 악소(惡少)라 불리는 무뢰배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며, 사료에는 충혜왕이 이들과 함께 벌인 악행들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사적인 재정 기반 및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복위한 해에 사적으로 보흥고(寶興庫)를 설치하기도 하였고, 1342년(충혜왕 복위3)에는 의성창(義成倉)과 덕천고(德泉庫), 보흥고의 포(布) 4만 8,000필을 풀어 시장에 점포[鋪]를 열게 하였다. 또한 측근을 통해 금 · 은 · 포 등을 원에 가지고 가서 무역하게 하거나, 포를 회회가(回回家)에 주어 그 이윤을 취하기도 하였다. 후자의 경우 당시 회회 상인들이 주축이 되어 행해지던 원의 알탈(오르톡) 무역에 참여한 정황을 보여 준다. 관련해서 1343년(충혜왕 복위4)에 지은 삼현신궁(三峴新宮)이 대규모 방직 시설로서 설계, 설립된 공간이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 과정에서 무리하게 세금을 징수하거나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는 등의 실정(失政)이 있었다.
1343년 8월, 이운(李芸) · 조익청(曹益淸) · 기철(奇轍) 등이 원 중서성(中書省)에 상서(上書)해, 왕이 탐욕스럽고 음탕하며 부도덕한 행동을 하니, 고려에 입성(立省)해서, 즉 고려의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원 내지의 행성들과 동일하게 운영해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같은 해 11월, 원의 사신들이 와서 충혜왕을 원으로 압송해 갔고, 같은 해 12월, 원에서는 백성을 심하게 착취한 죄를 물어 충혜왕을 게양현(揭陽縣)으로 유배 보냈다. 이듬해 정월, 왕은 유배길에 악양현(岳陽縣)에서 사망했는데, 당시 나라 사람들 가운데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고, 소민(小民) 중에는 기뻐하는 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1357년(공민왕 6) 헌효(獻孝)라는 시호를 올렸고, 1367년(공민왕 16) 원에서 충혜(忠惠)라는 시호를 내렸다. 능은 영릉(永陵)으로 지금의 개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