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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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후기 제28대 충혜왕 때 심양왕의 옹립을 위해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339년(충숙왕 복위 8)
주요 관직
우상시|선부전서|찬성사|첨의좌정승
관련 사건
조적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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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후기 제28대 충혜왕 때 심양왕의 옹립을 위해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
생애 및 활동사항

의흥군(義興郡) 역리(驛吏) 출신이라고 하는데 확실하지 않다. 충렬왕 때 환관들과 결탁해 권세를 떨쳤다.

충선왕이 즉위하자 왕의 총애를 받아 여러 차례 승진해 우상시(右常侍)에 이르렀다. 1312년(충선왕 4) 환관을 바치고자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1320년(충숙왕 7) 선부전서(選部典書)가 되었다. 1323년에는 만호로서 원나라에 공물을 바친 적도 있다.

일찍이 염승익(廉承益)의 서녀(庶女)와 혼인했는데, 장인의 외손인 정안군(定安君) 허경(許慶)과 재물을 놓고 다투다가 최안도(崔安道) 등의 직설로 왕의 미움을 샀다. 그러자 호군인 고자영(高子英) 등과 몰래 원나라로 도망하였다.

그 뒤 채하중(蔡河中)과 더불어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에게 아부해 갖은 모략으로 충숙왕을 비방함으로써 원나라 조정이 왕을 불신하도록 조장하였다. 또한 심양왕이 다시 고려 왕으로 즉위하기를 노려, 1324년에는 원나라에 거주하는 고려인 2,0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원나라의 한림원(翰林院)과 중서성을 상대로 충숙왕을 헐뜯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결과 1327년에 왕이 심양왕에게 선위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조년(李兆年) 등의 반대로 취소되자, 왕이 귀와 눈이 멀어 정사를 처리하지 못한다고 무고하였다. 1328년에 원나라의 태정제(泰定帝)가 평장사(平章使) 매려(買驪)와 사인(舍人) 역특미실불화(亦忒迷失不花)에게 진상을 조사하도록 명하자, 매려 등과 함께 고려에 돌아왔으나 무고임이 드러나자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다.

1332년(충혜왕 2) 선왕인 충숙왕이 복위하자 심양왕과 함께 귀국해 지밀직사(知密直事)가 되고, 이듬 해 찬성사를 거쳐 1338년(충숙왕 복위 7)에 첨의좌정승(僉議左政丞)에 올랐다. 1339년 충숙왕이 죽고 충혜왕이 복위하자 심양왕과 함께 원나라로 가던 도중 평양에 이르러, 충숙왕 비인 경화공주(慶華公主)로부터 충혜왕의 음란함을 듣고 왕의 폐위를 공언하였다.

그리고 개경에 돌아와 전 호군 이안(李安) 등을 순군수령(巡軍首領)으로 삼아 국인(國印)을 영안궁(永安宮)에 감춘 뒤 무리 1,000여 명을 이끌고 충혜왕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패배해 살해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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