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흥군(義興郡: 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의흥면) 역리(驛吏) 출신이라고 하는데 확실하지 않다.
충렬왕(忠烈王) 때 환관들과 결탁해 권세를 떨쳤다.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자 왕의 총애를 받아 여러 차례 승진해 우상시(右常侍)에 이르렀다. 1312년(충선왕 4) 환관을 바치고자 원(元)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1320년(충숙왕 7) 선부전서(選部典書)가 되었다. 1323년(충숙왕 10)에는 만호(萬戶)로서 원에 공물을 바친 적도 있다.
일찍이 염승익(廉承益)의 서녀(庶女)와 혼인하였는데, 장인의 외손인 정안군(定安君) 허경(許慶)과 재물을 놓고 다투다가 최안도(崔安道) 등의 직설로 왕의 미움을 샀다. 그러자 호군(護軍)인 고자영(高子英) 등과 몰래 원으로 도망하였다.
그 뒤 채하중(蔡河中)과 더불어 심왕(瀋王) 왕고(王暠)에게 아부해 갖은 모략으로 충숙왕(忠肅王)을 비방함으로써 원 조정에서 충숙왕을 불신하도록 조장하였다. 또한 심왕이 다시 고려 왕으로 즉위하기를 노려, 1324년(충숙왕 11)에는 원나라에 거주하는 고려인 2,0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원의 한림원(翰林院)과 중서성(中書省)을 상대로 충숙왕을 헐뜯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결과 1327년(충숙왕 14)에 왕이 심왕에게 주3 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이조년(李兆年) 등의 반대로 취소되자, 왕이 귀와 눈이 멀어 정사(政事)를 처리하지 못한다고 무고하였다. 1328년(충숙왕 15)에 원나라의 태정제(泰定帝)가 평장사(平章使) 매려(買驪)와 사인(舍人) 역특미실불화(亦忒迷失不花)에게 진상을 조사하도록 명하니 매려 등과 함께 고려에 돌아왔으나, 무고임이 드러나자 다시 원으로 돌아갔다. 1332년(충혜왕 2) 선왕(先王)인 충숙왕이 복위하자 심왕과 함께 귀국해 지밀직사(知密直事)가 되고, 이듬 해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1338년(충숙왕 복위 7)에 첨의좌정승(僉議左政丞)에 올랐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충숙왕이 주4 조적은 다시 심왕 왕고를 왕위에 올릴 것을 도모하였는데, 당시 충숙왕비 경화공주(慶華公主)가 전왕(前王)인 충혜왕(忠惠王)에게 간음당한 일을 듣고는 정동행성(征東行省) 관원과 함께 왕을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는 영안궁(永安宮)에 이르러 백관(百官)을 모아서 군소(群小)를 쫓아낼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그가 지지하였던 심왕을 고려 왕위에 올리기 위한 것이었다. 전 호군 이안(李安) 등을 순군수령(巡軍首領)으로 삼아 국인(國印)을 영안궁에 감춘 뒤 무리 1,000여 명을 이끌고 충혜왕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패배해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