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남만(南蠻)사람으로 일찍이 상선(商船)을 따라 원나라의 연경(燕京)에서 살았는데, 원나라에 있던 충숙왕과 친하게 되어 왕이 귀국할 때 따라왔다. 의술에 능하여 왕의 지극한 총애를 받아 사부(師傅)로 칭하였다.
어진 이를 시기하며 능한 이를 미워하고, 벼슬을 팔고 형옥(刑獄)을 팔며 심지어는 조정에서 대관(臺官)을 욕하여도 왕은 이를 깨닫지 못하였다. 또한, 음양(陰陽)과 환술(幻術)로 왕을 꾀어 한양·부원(富原)·용산에 행차하게 하여 오랫동안 머물게 함으로써 공주가 용산에서 아이를 낳고 죽기도 하였다.
이때에 비서(飛書)가 있었는데 “선사(禪師) 조륜(祖倫)과 사부 왕삼석이 왕을 꾀어 오랫동안 바닷가의 용산땅에 머물게 하여 공주로 하여금 전장(氈帳)에서 아이를 낳아 병을 얻게 하였으니, 만약 원나라 황제에게 고하면 두 사람의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어 문선왕상(文宣王像: 공자 상)을 새기고자 하였는데, 성균관박사 이훤(李暄), 학록(學錄) 신집(申諿) 등이 성균관의 대성전(大成殿)을 닫고 들이지 아니하니, 이들을 참소하여 이문소(理問所)에 가두고 그 직을 파하였다.
왕삼석의 방자함이 이와 같아서 사신(史臣) 유사렴(兪思廉)은 “삼석은 학술(學術)이 없는 만인(蠻人)인데, 왕이 그를 혹신(惑信)하여 측근에 두어서 오직 벼슬을 팔고 송옥(訟獄)을 팔 뿐 아니라 조정에서 풍헌관(風憲官)을 욕보이는 데 이르렀건만 왕이 이를 깨닫지 못하니, 아첨하고 간사한 사람을 멀리하기가 이같이 어렵다.”라고 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