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연남(燕南) 출신. 일명 양장(梁將)이라고도 한다. 양재(梁載)는 왕삼석(王三錫)에게 붙어 권력을 휘두르다가 사람들의 미움을 샀으며, 왕삼석이 죽자 연경(燕京)으로 돌아갔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갔을 때 왕의 총애를 얻어 우문군(佑文君)이 되었다. 그 후 양재는 낭장 조신경(曹莘卿)과 함께 인사행정을 주관하면서 환관들과 결탁하여 뇌물을 받고 거의 100여 명이나 벼슬을 주었다. 양재의 농간으로 승진한 사람으로는 좌대언(左代言) 조신경, 회의군(懷義君) 최노성(崔老星), 대광 원윤(大匡元尹) 신시용(申時用), 지평(指平) 윤현(尹賢) 등이 있다.
1336년(충숙왕 5) 지공거(知貢擧) 채홍철(蔡洪哲)과 안규(安珪)에게 부탁해 평소 친한 이윤(李閏)을 급제시켰다. 그러자 많은 장사꾼들과 잡류(雜類)들이 양재에게 부탁해 벼슬에 오르려 하였다. 수 많은 사대부(士大夫)들이 양재에 의해 배출되었다.
양재의 장인 왕천우(王天祐)가 재상 이설(李偰), 김원식(金元軾)과 노비 문제로 다투었는데 총랑 윤혁첨(尹奕瞻)이 오랫동안 판결하지 않았다. 이에 양재는 윤혁첨의 직위를 빼앗아 윤현(尹賢)으로 대신하게 하니, 윤현은 즉시 왕천우에게 유리하게 판결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