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와 출신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고종 때 서해도(西海道) 양산성(椋山城)의 방호별감(防護別監)으로 임명되어 몽고침입을 방어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양산성은 사면이 깎아지른 벼랑과 같았고 사람과 말이 겨우 통행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만 있어 천혜의 요새였다. 그러나 권세후는 지형의 험준함을 믿고 몽고군을 방비할 대책을 세우는 데 소홀하였다.
1253년(고종 40) 몽고의 제5차 침입이 시작되어 같은 해 8월에 야고(也古, 也窟: 몽고 憲宗의 숙부) 대왕이 지휘하던 몽고군 본진이 양산성에 도착하였다. 몽골군은 양산성을 대포로 공격하고, 험한 벼랑을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불화살로 성 안을 공격하니 성 안의 인가들이 소실되었다. 적들이 사방에서 돌입하여 성이 함락될 즈음 권세후는 목매어 자살하였다. 이때 성안으로 피난했다가 화를 당한 사람은 4,700여 명에 달했다. 이로써 서해도 방어선이 사실상 무너지게 되었다. 양산성전투의 결과는 방호별감의 전투준비와 지휘능력이 전투의 성패에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일깨워주는 좋은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