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강릉(江陵)이며 출신지는 명주(溟州: 강릉)이다. 일명 해장(海莊)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김종연(金宗衍)이고 동생은 김덕린(金德麟)이다.
1258년(고종 45) 몽고의 제6차 침입이 시작되어, 1259년(고종 46) 산길대왕(散吉大王) 등이 지휘하는 몽고군이 동진군을 동원하여 동북 변경을 위협하고 명주 근처까지 남침해왔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몽골군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김천(金遷)의 어머니와 동생 김덕린도 몽골군에게 포로로 잡혀갔다. 당시 15세였던 김천은 잡혀간 사람들의 다수가 길에서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어머니의 제사를 지냈다.
14년 뒤에 백호(百戶) 습성(習成)을 통해 어머니가 노비로 살고 있다는 편지를 받았다. 몸값을 내고 어머니를 풀려나게 하려고 서울에 와 두 번이나 신청했으나 두 번 다 허가받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편지를 받은 지 6년째 되던 해 천호(千戶) 효지(孝至)를 따라 몽고 동경(東京)으로 가서, 고려의 역어별장(譯語別將) 홍명(弘命)과 함께 북주(北州) 천로채(天老寨)로 가서 어머니를 찾았다. 몽고 군사인 요좌(要左)의 집에서 노파가 된 어머니를 찾았으나 요좌를 만나지 못해 어머니를 풀려나게 하지 못했다. 한 달 뒤 요좌의 집에 가서 은(銀) 55량(兩)으로 겨우 어머니를 풀려나게 하였으나, 백호(百戶) 천로(天老)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는 동생 김덕린은 풀려나지 못하였다.
1276년(충렬왕 2) 원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귀국했으며, 명주 가까이 왔을 때 아버지 김종연이 이 소식을 듣고 진부역(珍富驛)까지 마중 나와 부부가 서로 만났다. 다시 6년이 지난 뒤 천로의 아들이 동생 김덕린을 데리고 왔으므로 김천은 86냥을 주고 동생을 풀려나게 하였다.
김천은 대몽항쟁기의 대표적인 효자로서 명성이 높았으며 『고려사(高麗史)』 효우(孝友) 열전에 입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