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무송(茂松)이며 1216년(고종 3)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내시(內侍)에 소속되었다가 여러 벼슬을 거친 뒤 합문 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이 되었으며, 이후 충청도·전라도의 안찰사(按察使)를 역임하면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1235년(고종 22) 동남도 도지휘부사(東南道都指揮副使)가 되었으며, 통도사(通度寺)에 들려 석가의 진신 사리를 참배하였다.
안동도호부사(安東都護副使)로 근무할 때 산성(山城)수축 문제 때문에 판관 신저(申著)의 참소를 받아 암타도(岩墮島)로 유배되었다. 그 후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등용되었다. 당시 용진현(龍進縣)에서 생산되는 해산물인 강요주(江瑤柱: 돌조개과에 딸린 바닷조개의 일종)를 잡아 무신집권자 최우(崔瑀)에게 납부해왔는데, 이를 잡기가 매우 힘들어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했으므로 강요주의 납부를 면제하였다. 아울러 수령들이 백성들에게 재물을 빼앗아 권력자에게 바치는 것도 금지하였다. 이러한 선정(善政)으로 인해 당시 동북 지역 사람들이 유석에게 감동되어 유석을 어버이라고 불렀다.
그 후 예빈경(禮賓卿)이 되어 몽고사관반(蒙古使館伴)을 담당하였는데, 참소를 받아 연화도(蓮花島)로 유배되었다. 최항(崔沆)이 정권을 잡자 인심을 수습하기 위해 유석을 불러서 지형부사(知刑部事)로 삼았다. 당시 대장군 김보정(金寶鼎)과 이보(李輔)가 노비 문제로 송사를 하였는데, 유석이 공정하게 처리하자 두 사람이 유석을 원망하여 최항에게 참소했다. 이로 인해 1250년(고종 37) 안북도호부사(安北都護副使)로 좌천되었다. 부임한 지 몇 달 뒤에 사망하였다.
유석은 고려 무신정권기 대표적인 청백리로서 명성이 높았으며, 『고려사(高麗史)』 양리(良吏) 열전에 입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