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와 출신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자는 낙운(樂雲)이며 이종주(李宗胄)라고도 한다. 이수(李需)는 고종대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한시도 최우(崔瑀)의 곁을 떠나지 않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재질이 민첩하고 학식이 풍부하며 글을 빨리 지었다.
내시(內侍) 조산대부(朝散大夫) 상서예부시랑(尙書禮部侍郞) 직보문각(直寶文閣) 태자문학(太子文學) 등을 역임하여 주로 문한관(文翰官)을 맡아보았다. 당대 명유(名儒)라 할 수 있는 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이백순(李百順)·하천단(河千旦)·이함(李咸)·임경숙(任景肅) 등과 어울리며 문명(文名)으로 이름이 높았다. 최우의 사랑을 받았던 문사였다는 점에서 서방(書房)에서 근무하면서 중요한 문서를 다루었을 개연성이 크다. 1241년(고종 28) 이규보의 부탁으로 이규보의 묘지명을 짓기도 하였다.
아내가 사망하자 상기(喪期)를 마치기도 전에 처조카의 처와 간통했다. 처조카의 처가 이 사실을 감추려 남편을 해치려던 일이 탄로나 이수는 1243년(고종 30) 섬으로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