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숙왕은 1313년∼1330년, 1332년∼1339년에 재위하였다. 이름은 왕도(王燾), 몽골명은 아라트나시리[阿剌訥忒失里]. 자는 의효(宜孝). 충선왕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몽골인 의비(懿妃: 몽골명은 也速眞)이다. 비(妃)는 원(元)의 영왕(營王) 에센테무르[也先帖木兒]의 딸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 원 위왕(魏王) 아목가(阿木歌)의 딸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와 경화공주(慶華公主),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홍규(洪奎)의 딸 명덕태후(明德太后: 덕비(德妃)) 등 4명이다.
1294년(충렬왕 20) 출생으로, 1299년(충렬왕 25)에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졌고, 뒤에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해졌다. 1308년(충렬왕 34) 충선왕을 따라 원에 갔다가 1313년(충선왕 5)에 왕위를 물려받고 돌아와서 연경궁(延慶宮)에서 즉위하였다. 그러나 충선왕은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에도 원에 있으면서 지(旨)를 전달해 고려의 국정을 관리했으므로, 충숙왕이 왕권을 행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욱이 충선왕은 충숙왕에게 양위하면서 조카인 왕고(王暠)를 세자로 책봉하고 원으로 불러 독로화(禿魯花, 투르칵)로 머물게 하였고, 1316년에는 자신의 심왕위(瀋王位)를 왕고에게 물려주었다. 왕고는 얼마 후 충선왕비 계국대장공주의 조카인 눌룬(訥倫) 공주와 결혼하였다. 왕고의 혼인 이후 충숙왕 또한 복국장 공주와 혼인했지만, 원의 제왕위를 보유하고 황실 부마이기도 한 고려 종실의 존재는 충숙왕에게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충숙왕은 1318년(충숙왕 5) 5월, 그간 폐단이 많았던 사심관(事審官)을 폐지하는 한편, 제폐사목소(除弊事目所)를 설치했다가 이를 찰리변위도감(察理辨違都監)으로 고쳐 권세가가 탈점한 전민(田民)을 색출해 그것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권세가들이 이를 불만으로 여겨 충선왕에게 호소해 충선왕의 개입으로 찰리변위도감이 폐지되었고, 이후 충선왕이 실각한 후인 1321년(충숙왕 8)에 다시 설치되었된 것을 보면, 찰리변위도감의 개혁이 대상으로 한 권세가에는 충선왕을 지지한 세력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320년(충숙왕 7) 원에서 인종(仁宗)이 사망하고 영종(英宗)이 즉위하는 정국 변동 속에서 충선왕이 실각하고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자, 이듬해에 충숙왕은 충선왕의 측근 신료로서 고려의 인사(人事) 및 재정 등을 좌우하던 권한공(權漢功) · 채홍철(蔡洪哲) 등을 수감하여 국문하고 유배보냈다. 충선왕의 영향에서 벗어나 스스로 국정을 관리하기 위한 첫 조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해 충숙왕은 원 조정에 들어오라는 명을 받고 입조했다가 그대로 억류되어, 영종이 사망하고 태정제(泰定帝)가 즉위하는 정국 변동 속에서 1324년(충숙왕 11)에 이르러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이는 충선왕이 실각하고 충숙왕이 그 측근 세력들을 숙청해 나가는 가운데, 충숙왕으로부터의 처벌을 피하고자 한 정치 세력이 원 조정에 충숙왕을 무고하고 심왕 왕고를 고려 국왕에 세우고자 하는 가운데 벌어진 일이었다. 1321년 시작된 이른바 ‘심왕옹립운동’은 충선왕의 측근 세력들이 주도하고 다른 고려의 신료들도 대거 동조하는 가운데 진행되었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에 심왕옹립운동을 추진했던 세력 가운데 일부는 그 연장선상에서 고려 국호를 없애고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원 내지의 행성과 동일한 형태로 만들 것, 즉 입성(立省)을 원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1325년(충숙왕 12) 충숙왕은 다시 한번 개혁 교서를 반포해 당시의 국정과 관련한 방대한 개혁안을 제시하며 심왕옹립운동과 입성론 등으로 혼란해진 정국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후로도 심왕 측의 무고로 원 사신의 조사를 받게 되는 상황 등이 연이어 발생하는 가운데 개혁이 지속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충숙왕이 정치를 일부 측근 신료들에게 일임하자, 측근 신료들 가운데에도 당시 원에서 케식 생활을 하며 원의 실권자 엘테무르[燕帖木兒]의 신임을 받고 있던 세자를 왕위에 올리고자 하는 세력이 대두했다. 이에 충숙왕은 1329년(충숙왕 16) 10월, 세자에게 왕위를 넘길 것을 원에 요청하였고, 1330년(충숙왕 17) 2월 왕위에서 물러났다. 즉위 후 충숙왕의 측근 세력을 정계에서 몰아내며 충숙왕 지지 세력과 갈등하던 충혜왕이 1332년(충숙왕 복위1) 원의 정국 상황과 관련해 폐위되자, 충숙왕이 다시 왕위에 올랐다. 복위 후에는 정사를 크게 돌보지 않다가 1339년(충숙왕 복위8) 사망하였다.
1344년(충혜왕 복위5) 원에서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주었고, 1357년(공민왕 6)에 의효(懿孝)라는 존호를 덧붙여 올렸다. 능은 의릉(毅陵: 북한 개성 소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