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무민(無悶), 호는 중암거사(中菴居士).
1283년(충렬왕 9) 과거에 급제해 응선부녹사(膺善府錄事)에 보임되었다.
그 뒤 다섯 차례 전직한 후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로 장흥부(長興府)에 출보되었다가 물러났다. 14년을 한거(閑居)하면서, 불교와 음악·의약 등을 연구하였다.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사의부정(司醫副正)으로 부름을 받고, 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였다. 1314년(충숙왕 1)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5도순방계정사(五道巡訪計定使)에 임명되었다.
5도의 양전(量田)과 부세(賦稅)의 균정(均定)에 대한 일을 맡아 1년간 재직하면서 민전(民田)을 탈취하는 등 사리를 취해 일약 거부가 되었다.
이듬 해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오르고, 이어 삼사사(三司使)·찬성사(贊成事)를 차례로 역임하고, 1320년 평강군(平康君)에 피봉(被封)되었다. 그러나 권한공(權漢功) 등과 더불어 당파를 맺고 권력을 휘두른 것이 화근이 되어 1321년 일당과 함께 장류(杖流)되고 집을 몰수당하였다.
이에 원한을 품고 당시의 미묘한 정세를 틈타 권한공 등과 함께 원나라에 청원서를 올리는 등 심양왕 왕고(瀋陽王 王暠)를 왕위에 세우려는 운동을 벌였다. 1332년 충숙왕이 복위하자 다시 찬성사로 기용되어 삼중대광(三重大匡) 순천군(順天君)으로 개봉(改封)되고, 순성보익찬화공신(純誠輔翊贊化功臣)의 호를 받았다.
문장과 각종 기예에 모두 능했는데, 특히 의약과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불교에 심취하였다. 일찍이 자기 집 북쪽에 전단원(旃檀園)을 지어 선승(禪僧)을 기거하게 하는 한편 많은 사람들에게 의약과 의술을 베풀었다. 집 남쪽에는 중화당(中和堂)을 두어 국로(國老) 8인을 맞아 기영회(耆英會)라 칭하였다.
「자하동신곡(紫霞洞新曲)」이라는 음악을 작곡했으며, 이곡(李穀)·이제현(李齊賢) 등과도 교유가 있었다. 『동문선』에 「복주영호루(福州暎湖樓)」 등 시 몇 편이 있고, 저작으로 『중암집(中菴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