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4년(원종 5) 몽고가 친조(親朝)를 요구하자 왕은 음양가(陰陽家)인 백승현(白勝鉉)의 말을 믿고 마리산(摩利山)에 가궐(假闕)을 지어 모면하려 하였다.
이 때 예부시랑(禮部侍郎)으로 있으면서 “혈구(穴口)는 흉한 산인데 승현이 대일왕(大日王: 毘盧遮那의 음역으로 태양이 가진 속성처럼 중생들을 두루 비추어 지혜의 광명을 내는 부처라는 의미)이 머무는 곳이라 하여 불사를 일으키도록 고종에게 권했지만 얼마 아니되어 고종이 죽었다.”고 하는 전왕(前王)의 일을 들어 박송비(朴松庇)를 통해 당시의 권신 김준(金俊)에게 백승현의 말을 물리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백승현의 말을 믿고 있던 김준에 의해 죽임을 당할 뻔하였다. 1269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된 뒤 1272년 동서학당이 설치되자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로 별감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