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개경의 본궐(本闕)과는 별도로 이궁(離宮)이자 별궁(別宮)을 짓기 위해 고려 전기에 연경궁(延慶宮)을 건립하였다. 문종 때 사(使) 1명, 부사(副使) 1명, 녹사(錄事) 2명을 두고 연경궁의 관리를 맡도록 하였다.
고려시대 수창궁(壽昌宮)과 더불어 대표적인 이궁 · 별궁으로, 본궐 동쪽에 있었다. 1022년(현종 13) 연경궁주(延慶宮主) 김씨(金氏)를 왕비로 책봉한 데에서 처음 나오며, 인종(仁宗, 1109~1146)이 자주 거처로 이용하였다.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있었던 1126년(인종 4)에 불탔으며, 1127년(인종 5) 인덕궁(仁德宮)으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지만, 1137년 무렵부터 다시 연경궁으로 불렸다. 13세기 몽골의 침입 때에도 소실되었다.
연경궁이 본격적으로 활용된 것은 충선왕(忠宣王, 12751325) 이후이다. 1309년(충선왕 1) 충선왕이 연경궁을 중수하여 자신의 궁으로 만든 이후 1313년(충선왕 5)에 제거사(提擧司)라는 관부를 설치하여 연경궁을 관리하게 하였다. 1313년(충숙왕 즉위년) 충숙왕(忠肅王, 12941339)은 이곳에서 즉위했으며, 당시 상왕인 충선왕은 연경궁에서 2일간 승려 2,000명에게 반승(飯僧)을 베풀고 등(燈) 2,000개를 켰다.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전기까지 궁궐의 운영은 본궐의 강안전(康安殿)과 이궁인 연경궁을 축으로 운영되었다. 고려 말 홍건적(紅巾賊)의 제2차 침입 때인 1361년(공민왕 10)에 파괴된 이후로 복구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흔히 만월대(滿月臺)로 불렸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지리지(地理志)에서는 연경궁을 고려의 본궐로 잘못 인식하고 기록하였다.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이래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까지 연경궁은 고려 본궐과 동일하게 사용되었으며, 정전은 건덕전(乾德殿)이라고 서술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충선왕 대 이후 연경궁이 활발하게 활용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연경궁이 본궐 동쪽 가까이에 있었던 것도 연경궁을 본궐로 오인한 이유의 하나였다.
고려 전기 연경궁의 규모를 전하는 자료가 없어서 궁의 형태나 크기 등을 알 수 없다. 하지만 고려 후기인 1309년 3월에 검교중호(檢校中護) 배정(裴挺)의 주도 하에 연경궁의 전각과 회랑이 총 410개의 기둥을 갖춘 규모로 설계되었던 것을 통해서 연경궁의 규모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 이궁이었던 연경궁은 이자겸의 난, 몽골 침입 등으로 불탔지만 다시 중건되었고, 홍건적의 제2차 침입 이전까지 오랜 기간 동안 개경의 본궐과 더불어 고려의 대표적인 궁궐로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