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고려시대에 이궁과 별궁으로 사용한 개성 송악산 부근에 있었던 궁궐.
건립 경위
변천
연경궁이 본격적으로 활용된 것은 충선왕(忠宣王, 1275~1325) 이후이다. 1309년(충선왕 1) 충선왕이 연경궁을 중수하여 자신의 궁으로 만든 이후 1313년(충선왕 5)에 제거사(提擧司)라는 관부를 설치하여 연경궁을 관리하게 하였다. 1313년(충숙왕 즉위년) 충숙왕(忠肅王, 1294~1339)은 이곳에서 즉위했으며, 당시 상왕인 충선왕은 연경궁에서 2일간 승려 2,000명에게 반승(飯僧)을 베풀고 등(燈) 2,000개를 켰다.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전기까지 궁궐의 운영은 본궐의 강안전(康安殿)과 이궁인 연경궁을 축으로 운영되었다. 고려 말 홍건적(紅巾賊)의 제2차 침입 때인 1361년(공민왕 10)에 파괴된 이후로 복구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흔히 만월대(滿月臺)로 불렸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지리지(地理志)에서는 연경궁을 고려의 본궐로 잘못 인식하고 기록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이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까지 연경궁은 고려 본궐과 동일하게 사용되었으며, 정전은 건덕전(乾德殿)이라고 서술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충선왕 대 이후 연경궁이 활발하게 활용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연경궁이 본궐 동쪽 가까이에 있었던 것도 연경궁을 본궐로 오인한 이유의 하나였다.
형태와 특징
의의 및 평가
참고문헌
원전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 김창현, 『고려 개경의 구조와 그 이념』(신서원, 2002)
논문
- 홍영의, 「고려시기 개경의 궁궐 조영과 운영」(『한국중세사연구』 28, 한국중세사학회, 2010)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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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고려 시대에, 궁궐 안에서 전명(傳命)과 잡역을 맡아 하던 관아. 문종 이래 벼슬아치는 사(使) 1명, 부사(副使) 1명, 녹사(錄使) 2명 등을 두었으나, 뒤에 제거사로 고치면서 벼슬아치의 수와 명칭도 고쳤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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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고려 시대에, 왕실에서 큰 법회를 열고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던 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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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고려 시대 개경의 궁궐 안에 있던 정전(正殿). 인종 16년(1138)에 중광전(重光殿)을 고친 것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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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중국 원나라 말기에, 허베이(河北)에서 한산동(韓山童)을 두목으로 하던 도둑의 무리. 머리에 붉은 수건을 쓴 까닭에 이렇게 이르며, 두 차례에 걸쳐 고려에까지 침범하였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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