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고려시대 개경의 서소문 안에 있었던 궁궐.
건립 경위
변천
1297년(충렬왕 23)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위하여 몽골식 천막인 궁려(穹廬)를 설치하려고 했다는 점과 1370년(공민왕 19) 공민왕이 수창궁의 옛터에 궁궐을 새로 지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수창궁은 1381년(우왕 7)∼1384년(우왕 10)에 중수하였고, 창왕 즉위 후 잠시 수령궁(壽寧宮)으로 개칭한 적이 있었다. 우왕 대 중수된 이후로 수창궁은 조선 초까지 주요 궁궐로 활용되어, 공양왕과 조선의 태조와 태종이 모두 이 궁에서 즉위하였다. 세종 대를 지나며 본래 모습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와 특징
1196년(명종 26) 4월에 수창궁 중서성문(中書省門)이 붕괴되었으며, 같은 해 8월에 명종이 수창궁을 떠나 연경궁으로 옮겼다. 1213년(강종 2) 8월에 강종이 수창궁 화평전(和平殿)에서 세상을 떠났다. 대몽 전쟁기인 1234년(고종 21) 11월에 고려 태조의 화상(畫像)을 수창궁에 봉안하였으며, 1250년(고종 37)~1251년(고종 38)에는 이곳에서 몽골 사신을 접대하기도 하였다.
원 간섭기인 1297년(충렬왕 23)에는 고려 세자〔훗날 충선왕〕가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使事) 최충소(崔冲紹)에게 명해 수창궁 터에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가 기거할 궁려를 짓도록 하였는데, 당시 공사 독촉이 너무 심해 많은 사상자가 나기도 하였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제2차 침입 때 연경궁이 불에 타 다시 수창궁으로 공민왕이 옮겨 갔다. 1370년(공민왕 19) 8월에 공민왕이 수창궁 터에 궁궐을 다시 지을 것을 명하였다. 1381년 3월 우왕이 다시 중수할 것을 명하여 1384년에 드디어 수창궁 중건이 완료되었다.
의의 및 평가
참고문헌
원전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 김창현, 『고려 개경의 구조와 그 이념』(신서원, 2002)
논문
- 홍영의, 「고려시기 개경의 궁궐 조영과 운영」(『한국중세사연구』 28, 한국중세사학회, 2010)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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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강화’의 다른 이름.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의 침입으로 도읍을 이곳으로 옮긴 후, 원종 11년(1270)에 환도(還都)할 때까지 39년 동안 임시 수도로 삼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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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고려 충렬왕의 비(妃)(1259~1297). 이름은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 중국 원나라 세조의 딸로 충렬왕이 세자로서 원나라에 체류할 때에 결혼하였으며 충선왕을 낳았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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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소인(小人)들의 무리.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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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고려 시대에, 왕명의 출납과 숙위(宿衛), 군기(軍機) 따위를 맡아보던 관아. 헌종 1년(1095)에 중추원을 고친 것으로 충렬왕 1년(1275)에 밀직사로 고쳤다가 공민왕 5년(1356)에 다시 이 이름으로 고쳤으며 공민왕 11년(1362)에 다시 밀직사로 고쳤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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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고려 시대에, 밀직사에 속한 종이품 벼슬.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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