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대장공주 ()

개풍 고려 제국대장공주 고릉 정면
개풍 고려 제국대장공주 고릉 정면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후기 제25대 충렬왕의 제1 왕비.
이칭
이칭
원성공주(元成公主), 안평공주(安平公主), 장목인명왕후(莊穆仁明王后), 인명태후(仁明太后)
인물/전통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259년(고종 46)
사망 연도
1297년(충렬왕 23)
출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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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제국대장공주는 고려후기 제25대 충렬왕의 제1 왕비이다. 1259년(고종 46)에 태어나 1297년(충렬왕 23)에 사망했다.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로, 이름은 홀도로게리미실이다. 고려 원종이 세조에게 요청하여, 16세의 나이에 39세의 충렬왕과 혼인하였다. 조정에서 중앙에 배석하는 등 충렬왕보다 위상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화궁주 무고사건을 일으켜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고 아들 충선왕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국정에도 개입하였다. 원 무종이 '황고 제국대장공주 고려국 왕비'로 추봉하였다.

정의
고려후기 제25대 충렬왕의 제1 왕비.
생애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는 1259년에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로 태어났다. 이름은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이다. 1274년(원종 15) 5월에 충렬왕이 세자로서 원나라에 있을 때 혼인하였다. 그리고 이 해에 충렬왕이 즉위하면서 함께 고려에 들어왔다.

1275년 원성공주(元成公主)로 봉하고, 그의 궁(宮)을 경성(敬成), 전(殿)을 원성(元成), 부(府)를 응선(膺善)이라고 이름 짓고 관속을 두었으며 안동(安東) 경산부(京山府)를 탕목읍(湯沐邑)으로 정하였다. 1276년(충렬왕 2) 9월에 충선왕을, 1277년에 공주를, 그리고 1278년에 왕자를 출산하였다.

1294년(충렬왕 20)에 원나라 성종(成宗)이 안평공주(安平公主)로 봉하였다. 1297년(충렬왕 22) 5월에 원에서 귀국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들어 현성사(賢聖寺)에서 사망하였는데 향년 39세였다.

활동사항

1270년 원에 들어간 원종은 세조에게 고려 태자와 원공주의 혼인을 요청하지만 세조는 자신에게는 혼인할 딸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1271년에 다시 원종은 청혼표(請婚表)를 올리고, 이에 세조의 허락을 받아 양국은 혼인동맹을 맺게 되었다. 1274년 혼인 당시 제국대장공주는 16세, 충렬왕은 39세였다.

공주는 충렬왕과 혼인한 다음 달에 고려에 들어왔는데, 몽골식 풍속으로 몽골식 천막인 궁려(穹廬)를 가설하고 흰 양의 기름으로 액막이 제사를 지냈다. 공주의 몽골식 생활은 고려에 있는 동안 계속 되었다. 충선왕이 태어났을 때에는 공주를 시중들던 사람들이 문안하러 온 왕족과 관료들에게 문 입구에서 옷을 벗기는 이른바 '설비아(設比兒)'라는 몽골식 풍습을 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공주는 자신의 모친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면서도 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충렬왕 초기 공주의 위상은 충렬왕보다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충렬왕 즉위식에 참여한 다루가치가 공주가 그 자리에 없다는 것을 이유로 왕에게 절을 하지 않은 데서도 보인다. 공주는 남편인 충렬왕과 부부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보다 먼저 혼인한 왕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와 아들 강양공(江陽公) 왕자(王滋)가 있었다. 제국공주가 충선왕을 낳자 정화궁주가 탄생을 축하하는 연회를 개최하였는데, 공주는 정화궁주보다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하였다. 또 이 해에 정화궁주 무고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내용은 정화궁주가 제국대장공주를 질투하여 무당을 시켜 공주를 저주하였다는 것인데, 이후로 정화궁주는 별궁에 거처하여 제국대장공주가 사망할 때까지 충렬왕을 볼 수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공주가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에서 일으킨 것으로 보이며, 이는 공주가 국정에 개입하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즉 공주는 충렬왕에게 소인(小人)들과 함께 다니는 것을 중지할 것을 청하고, 노비 신분인 김자정(金子廷)을 동경부사(東京副使)에 임명한 것에 대한 반감을 직접 표출하여 충렬왕의 측근세력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특히 공주의 이러한 정치적 행위는 아들인 충선왕의 입지 강화와도 관련되었다. 제국대장공주의 위상은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1291년(충렬왕 17) 합단(哈丹)을 평정한 원나라 장수 설도간(薛闍干)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공주가 중앙에 앉고, 왕은 그 좌측에 앉았다는 것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제국대장공주는 또한 응선부를 통해 식리(殖利) 활동을 하였다. 즉 공주가 잣과 인삼, 그리고 국내 도자기 제조에 관여하고 이를 중국 강남에 수출하여 많은 이익을 얻었다. 또한 공주는 모시무역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어떤 여승이 흰 모시를 바쳤는데, 가늘기가 매미의 날개 같으며 꽃무늬도 놓여 있었다. 이에 공주는 여승이 소유하고 있는 노비를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제국대장공주의 정치적 성향과 경제적 식리활동은 그녀가 데리고 온 겁령구 등을 비롯한 자신의 세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자연히 이들의 권력남용은 큰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상훈과 추모

1297년 9월에 고릉(高陵)에 매장하였고 시호는 장목인명왕후(莊穆仁明王后)라고 하였다. 1298년(충렬왕 24)에 진왕(晉王)이 사람을 보내 제사하였으며 고당왕(高唐王)도 사람을 시켜 부의를 보내 왔다. 이 해에 충선왕이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오르자 인명태후(仁明太后)로 추존하고, 묘련사(妙蓮寺)를 원찰로 삼아 충선왕이 참배하였다. 1310년(충선왕 복위 2) 원 무종이 '황고 제국대장공주 고려국 왕비(皇姑齊國大長公主高麗國王妃)'로 추봉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시대의 후비(后妃)』(정용숙, 민음사 1992)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의 책봉과 그 의미」(이정란, 『한국인물사연구』 18, 한국인물사연구소, 2012)
「고려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의 위상과 역할」(김현라, 『지역과 역사』 23, 부경역사연구소, 2008)
「원 공주 출신 왕비의 정치권력 연구-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를 중심으로-」(권순형, 『사학연구』 77, 한국사학회, 2005)
「여원(麗元) 왕실 통혼(通婚)의 성립과 특징」(김혜원, 『이대사원』 24․25합집, 이대사학회, 1989)
관련 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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