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덕태후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후기 제27대 충숙왕의 제4왕비.
이칭
이칭
덕비(德妃), 공원왕후(恭元王后), 숭경왕태후(崇敬王太后)
인물/전통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298년(충렬왕 24)
사망 연도
1380년(우왕 6)
본관
남양(南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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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후기 제27대 충숙왕의 제4왕비.
생애

명덕태후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아버지는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홍규(洪奎)이고, 어머니는 참지정사 김련(金鍊)의 딸인 광주군대부인(光州郡大夫人)이다. 1298년(충렬왕 24)에 1남5녀 가운데 다섯째 딸로 태어났다. 충선왕비인 순화원비(順和院妃)와 자매간이다. 충숙왕이 왕위에 오르자 16세에 간선되어 덕비(德妃)로 책봉되었다.

1315년(충숙왕 2)에 충혜왕을, 1330년(충혜왕 즉위) 5월에 공민왕을 낳았다. 충혜왕이 왕위에 오른 후 태후에 봉해졌고, 덕경부(德慶府)가 설치되었다. 다시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자 덕경부를 문예부(文睿府)로 고치고, 대비(大妃)라고 존칭하였다. 1372년(공민왕 21) 1월에 숭경왕태후(崇敬王太后)로 책봉하고, 문예부를 숭경부(崇敬府)로 개칭하였다. 1380년(우왕 6)에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1. 충숙왕·충혜왕대

명덕태후는 16세에 네 살 위인 충숙왕과 혼인하였다. 태후는 행동거지가 바르고 예법에 맞아, 충숙왕이 매우 소중히 여겼다. 충숙왕이 1316년(충숙왕 3)에 원 공주인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를 맞아들이고, 그녀가 명덕태후를 질투하자 궁중에서 나와 정안공(定安公) 허종(許琮)의 집에 거처하였다. 정안공은 충선왕의 사위로 충숙왕 누이의 남편이었다. 이 때 충숙왕은 정안공의 집 근처에 거처를 마련하여 명덕태후와 왕래하였다.

복국장공주가 젊은 나이로 죽자 사인(死因)을 밝히기 위하여 원에서 사신이 파견되었다. 사신의 보고서에는 충숙왕이 명덕태후를 가까이 하자 복국장공주가 이를 질투하니 충숙왕이 여러 차례 공주를 구타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충숙왕의 태후에 대한 총애를 잘 알 수 있다.

1321년(충숙왕 8)에 충숙왕이 심왕세력에 의하여 원에 불려 들어간 뒤 한동안 고려에는 충숙왕세력과 심왕세력이 대립하였다. 이때 명덕태후는 자신의 집안인 남양홍씨 세력과 함께 심왕세력을 저지하는데 일조하였다. 즉 자신의 조카사위인 경사만(慶斯萬), 정안공 허종의 조부인 허공의 사위 김륜(金倫), 그리고 김인연(金仁沇), 홍빈(洪彬)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경사만, 김지경(金之鏡), 김인연 등은 충숙왕을 고려에 귀국시켜달라고 원에 청원하였다. 당시 심왕의 뜻에 의하여 권한공(權漢功)과 채하중(蔡河中)은 이들을 순군옥에 가두었는데, 명덕태후가 순군에 명하여 이들을 석방시켰다.

1329년(충숙왕 16)에 충숙왕은 충혜왕을 세자로 지목하고 다음해 양위하였다. 명덕태후는 충혜왕의 왕위세습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으리라 본다. 충숙왕이 왕위를 물려주는데 옆에서 도움을 준 이가 김지경인데, 김지경은 앞서 충숙왕세력으로서 명덕태후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1330년 충혜왕이 왕위에 오른 후 충숙왕은 명덕태후를 강제로 고향인 견주(見州)에 보내어 모자가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는 충숙왕이 정만길(鄭萬吉), 강융(姜融), 김원상(金元祥) 등의 이간하는 말을 곧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혜왕은 1330년 9월과 12월 두 차례 견주로 가서 명덕태후를 문안하였다. 명덕태후는 1336년(충숙왕 복위 5)에 환궁하였다.

충혜왕이 복위한 후 1343년(충혜왕 복위 4) 원에 의하여 강제 압송되자 정승들이 태후를 위로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태후는 이를 거절하면서 채하중 등에게 임금에게 간언하지 않는 것은 녹봉과 지위만 보전하겠다는 것이라고 질책하였다.

  1. 공민왕·우왕대

이러한 태후의 정치적 행보는 공민왕대에 더욱 자주 보인다. 1352년(공민왕 1) 왕이 종묘에서 친히 관제를 행하려고 하자 판서운관사(判書雲事) 강보(姜保)가 음양술을 삼가는 일을 들어 이를 막고자 하였다. 도당에서는 공민왕을 옹호하였으나 태후가 이를 알고 중지시켰다.

태후는 자신의 조카 홍언박과 각별하게 지내면서 그를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출하였다. 홍언박은 공민왕의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으로 태후와 공민왕 사이에서 중계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어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수도를 강화도에 옮기고자 할 때 홍언박에게 신하로서 이를 저지하지 못한 점을 꾸짖고 있다. 이에 홍언박은 태후의 의견을 공민왕에게 전달하고, 공민왕은 점괘가 나쁘게 나왔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중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흥왕사의 난으로 홍언박이 사망하자 태후는 경사만의 아들인 경복흥(慶復興) 등을 자신의 세력으로 결집시켰고, 이들을 통해 정치에 간여하였다.

태후의 정치적 행보로서 가장 중시되던 것이 바로 신돈의 정치를 비판한 것이다. 1366년(공민왕 15) 충혜왕비인 덕녕공주(德寧公主)가 문예부에서 태후를 위하여 연회를 베풀 때 태후는 신돈(辛旽)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다. 태후는 자신이 과부이기 때문에 외부의 승려와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신돈의 연회 참석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또한 1369년(공민왕 18) 가뭄이 심하게 들자 태후는 이 원인으로 공민왕이 신하인 신돈에게 정사를 위임한 것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전 공사로 인한 백성의 원성을 들고 있다. 이런 연유로 한동안 공민왕과 태후의 사이는 좋지 못하였으며, 신돈 사망 후 관계가 회복되었다.

공민왕이 시해되자 태후는 경복흥과 의논하여 종실에서 후사를 택하려고 하였다. 우왕(禑王)이 즉위한 후에도 우왕의 생모인 반야(般若)가 태후를 찾아와 자신이 생모임을 호소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태후가 내쫓았다는 점에서 우왕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우왕은 10세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태후가 섭정하였다. 왜구 격파에 공을 세운 경상도도순문사 조민수에게 하사할 교서 작성을 거부한 김자수를 우왕이 장류형에 처하려고 하자 태후는 우왕에게 충고하여 이를 말리고 있다. 또한 왜구들이 강화를 침범하자 그녀는 도당에 양백안(楊伯顔)을 보내어 당시 고려에 들어와 있던 왜승(倭僧) 등 사신들에게 왜구를 설득하여 백성이 다치지 않는 방법을 협상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 시기 그녀의 정치적 성향을 볼 수 있는 것이 마지막 유언에서 찾을 수 있다. 그녀는 사망하기 하루 전에 우왕에게 국가의 일은 항상 경복흥, 이인임(李仁任), 최영(崔瑩)과 의논할 것을 부탁하였다.

상훈과 추모

1380년(신우 6) 2월에 영릉(令陵)에 매장하였으며, 시호는 공원왕후(恭元王后)이다. 1391년(공양왕 3)에 예조에서 '정통 군왕 후계자를 낳은 왕비인데 아직 제사를 올리지 않는 것은 예절을 빠트린 것'이라는 주장에 따라 비로소 기제(忌祭)와 진전제(眞殿祭)를 지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시대의 후비(后妃)』(정용숙, 민음사 1992)
「홍규처김씨묘지명(洪奎妻金氏墓誌銘)」(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 한림대학교출판부, 2001)
「홍규묘지명(洪奎墓誌銘)」(『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 한림대학교출판부, 2001)
「고려 충숙왕비 명덕태후의 정치적 역할」(이숙경, 『한국인물사연구』 6, 한국인물사연구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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