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은 고려 후기 도형벽상1등공신, 진충분의좌명1등공신, 안사공신 등에 책록된 무신이다. 고려 말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공민왕을 시해하려던 흥왕사의 난, 덕흥군 옹립 시도 등을 평정하였다. 1388년(우왕 14) 문하시중으로서 염흥방·임견미 일당을 숙청하였고, 딸이 우왕의 비가 되었다. 명에서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보하자 요동 정벌에 나섰으나 이성계 세력이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정벌은 중단되고 최영은 처형되었다.
풍채가 괴걸하고 힘이 뛰어났다. 처음에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휘하에서 왜구를 토벌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워 우달치[于達赤:사문인(司門人)]가 되었다. 1352년(공민왕 1)에 안우(安祐) · 최원(崔源) 등과 함께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해 호군(護軍)이 되었고, 1354년에 대호군이 되었다.
당시 원(元)에서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유탁(柳濯) · 염제신(廉悌臣) 등 40여 명의 장수와 함께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원에 갔다. 그때 원 승상(丞相) 탈탈(脫脫) 등을 좇아 중국 고우(高郵) 등지에서 싸웠다. 1355년(공민왕 4)에는 회안로(淮安路)에서 적을 막았으며 팔리장(八里莊)에서 싸워 용맹을 떨친 뒤 돌아왔다.
이듬해부터 고려가 배원정책(排元政策)을 쓰게 되자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로 서북면병마사 인당(印璫)과 함께 원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공격해 파사부(婆娑府: 구련성(九連城)) 등 3참을 쳐부수었다. 1357년(공민왕 6) 동북면체복사(東北面體覆使)를 거쳐 이듬해 양광전라도왜구체복사(楊廣全羅道倭寇體覆使)가 되어 배 400여 척으로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구를 복병을 이용해 격파하였다.
1359년(공민왕 8) 홍건적 4만 명이 침입해 서경(西京)을 함락시키자, 여러 장수와 함께 생양(生陽) · 철화(鐵和) · 서경 · 함종(咸從) 등지에서 적을 무찔렀다. 이듬해 평양윤겸서북면순문사를 거쳐 그 이듬해 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 ·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가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 10만 명이 다시 침입해 개성을 함락시키자, 이듬해 안우 ·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이를 격퇴하여 개성을 수복하였다. 그 공으로 훈(勳) 1등에 도형벽상공신(圖形壁上功臣)이 되었고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올랐다. 이어 양광도진변사(楊廣道鎭邊使)를 겸했다가 도순문사를 겸하였다.
1363년(공민왕 12)에는 김용(金鏞)이 공민왕을 시해하려 했던 흥왕사(興王寺)의 변(變)을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훈 1등에 진충분의좌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이 되었고, 이어 판밀직사사평리(判密直司事評理)를 거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1364년(공민왕 13) 원에 있던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 충선왕의 셋째 아들)을 왕으로 받들고 군사 1만 명으로 압록강을 건너 선주(宣州: 평안북도 선천)에 웅거하였다. 이에 서북면도순위사(西北面都巡慰使)로서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수주(隨州: 평안북도 정주)의 달천(獺川)에서 싸워 물리쳤다. 또, 연주(延州: 평안북도 운산)에 침입한 동녕로만호(東寧路萬戶) 박백야대(朴伯也大)를 장수를 보내 격퇴시켰다.
1365년(공민왕 14) 교동(喬桐) · 강화(江華)에 왜구가 출몰하자 동서강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가 되어 동강(東江)에 나가 지켰다. 이때 신돈(辛旽)의 참소로 계림윤(鷄林尹)으로 좌천되었다가 귀양길에 올랐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처형되자 6년 만에 풀려나 다시 찬성사가 되었다. 1373년(공민왕 22)에는 육도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로 있으면서 군호(軍戶)를 편적(編籍)해 전함(戰艦)을 만들게 하였다.
1374년(공민왕 23) 경상 · 전라 · 양광도 도순문사가 되었을 때, 육도도순찰사 시절에 6도를 혼란스럽게 했다는 이유로 대사헌 김속명(金續命) 등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도리어 김속명이 파면되고 진충분의선위좌명정란공신(盡忠奮義宣威佐命定亂功臣)의 호가 하사되었다. 같은 해 명에서 제주도의 말 2,000필을 요구했는데, 제주도의 목호(牧胡)가 300필만 보내왔다. 이에 제주도를 치기로 하고, 양광 · 전라 · 경상도 도통사(楊廣全羅慶尙道都統使)가 되어 도병마사 염흥방(廉興邦)과 함께 전함 314척과 군사 2만 5,600명을 지휘, 제주도를 평정하였다.
1375년(우왕 1)에는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1376년(우왕 2) 연산(連山) 개태사(開泰寺)에 침입한 왜구에게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가 패배하자, 출정을 자원해 홍산(鴻山: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으며, 그 공으로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377년(우왕 3)에는 도통사가 되어 강화 · 통진(通津)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는 한편, 왕으로 하여금 교동 · 강화의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군자(軍資)에 충당하게 하였다. 이 무렵 왜구가 침입하여 개성을 위협하므로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군사로서 굳게 지킬 것을 주장하고 이를 반대하였다. 1378년(우왕 4) 왜구가 승천부(昇天府: 지금의 풍덕(豐德))에 침입하자, 이성계 · 양백연(楊伯淵) 등과 함께 적을 섬멸하고 그 공으로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되었다.
1380년(우왕 6)에는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가 되어 동서강(東西江)에 나가 왜구를 막다가 병에 걸렸다. 이때 왕은 공을 기록한 철권(鐵券)과 공을 치하하는 교서를 내렸다. 이듬해 아버지에게는 순충아량염검보세익찬공신(純忠雅亮廉儉輔世翊贊功臣) ·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 판문하사(判門下事) ·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 상호군(上護軍) · 동원부원군(東原府院君)이 증직되고, 어머니 지 씨(智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이 되었다. 그 자신은 수시중(守侍中)이 되었다가 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를 지냈고, 1384년(우왕 10) 문하시중을 거쳐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올랐다.
1388년(우왕 14) 다시 문하시중이 되어 왕의 밀령(密令)으로 부패와 횡포가 심하던 염흥방 · 임견미(林堅味)와 그 일당을 숙청하였다. 그 해 최영의 딸이 우왕의 비[寧妃]가 되었다. 이때 명에서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고하고 철령 이북과 이서 · 이동을 요동(遼東)에 예속시키려 했다. 이에 우왕과 더불어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스스로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하는 한편,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 우군도통사 이성계로 하여금 군사 3만 8,800여 명으로 요동을 정벌하게 하였다.
당시 이성계 등은 현실적으로 요동 정벌이 불가함을 들어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왕과 최영이 요동 정벌을 강행한 배경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이야기되고 있다. 한 가지는 당시 정치적으로 급성장하고 있던 이성계를 압박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에서 계획된 것이라는 해석이다. 다른 한 가지는 최영이 이성계가 회군할 경우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점을 근거로 전자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명의 철령위 설치 통보라는 외교적 사안에 대한 대응으로 보는 것인데, 이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기보다 무리한 군사적 대결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최영의 정치적 판단력 부족을 드러내는 해석이다.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요동 정벌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던 이성계가 조민수를 설득해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 정벌은 실패로 끝났고, 이성계의 회군 세력에 의해 우왕은 폐위되고 최영은 고향인 고봉현(高峯縣: 지금의 경기도 고양)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 다시 합포(合浦) · 충주로 옮겨졌다가 공료죄(攻遼罪: 요동을 공격한 죄)로 개성에 압송되어 순군옥(巡軍獄)에 갇혔고, 그 해 12월에 참수(斬首)되었다.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우고 나서 6년 만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개풍군(開豐郡) 덕물산(德物山)에 있는 최영의 무덤은 풀이 나지 않는다 하여 적분(赤墳)으로 불린다. 고려 말 계속되는 외적의 침입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군사적 지휘력을 발휘해 외침을 막았다는 점에서 백성의 신망을 받는 존재였다. 이에 그 사후 민간 차원에서 그를 기리는 여러 사당이 세워지고 관련한 전설이 만들어졌는데, 이 가운데에는 임진왜란 시기에 왜란 극복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도 있다. 최영은 이성계와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관계에 있었지만, 고려 말의 시대 상황 속에서 그가 담당한 역할을 바탕으로 한 그에 대한 민간의 숭앙은 조선 후기까지도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