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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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풍 흥왕사터 전경
개풍 흥왕사터 전경
불교
유적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덕적산(德積山)에 있었던 고려전기 제11대 문종의 원찰로 창건한 사찰.
내용 요약

흥왕사는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덕적산(德積山)에 있었던 고려 전기 제11대 문종의 원찰로 창건한 사찰이다. 1067년(문종 21) 정월에 고려 문종의 원찰로 창건되었다. 의천이 초대 주지를 맡았다 1086년(선종 3) 교장도감을 설치하여 교장 간행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 절은 몽고의 병란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그 뒤 1330년(충숙왕 17)에 정조, 달환 등의 화엄종 고승들이 9년 동안 공사하여 이전의 면모를 되찾았다. 이 절은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서 폐허가 되었다.

목차
정의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덕적산(德積山)에 있었던 고려전기 제11대 문종의 원찰로 창건한 사찰.
내용

고려시대의 대표적 사찰이며, 고려 문종원찰(願刹)로 창건되었다. 사치스럽고 장엄하다 하여 신하들의 반대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10년이 넘는 역사(役事)를 진행시켜 1067년(문종 21) 정월에 낙성하였다.

총 2,800칸의 규모로 지어진 이 절에는 수많은 승려들이 모여 들었지만, 계행(戒行)이 청정한 자만을 가려 1,000명을 뽑아 머무르게 하였다.

낙성하고 9일 동안 연등대회를 특별히 개설하고, 백사(百司) · 안서도호(安西都護) · 개성부(開城府) · 광주(廣州) · 수주(水州) · 양주(楊州) · 동주(東州) · 강화(江華) · 장단(長湍) 등 여러 주현(州縣)에 칙령을 내려 사문(寺門)에서부터 연로(輦路) 좌우에 채붕(綵棚)을 연결하고, 등산(燈山)과 화수(火樹)를 만들어 낮과 같이 불을 밝혔다고 한다. 왕은 친히 백관을 거느리고 행향납시(行香納施)하였는데, 그 성대함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대축제였다.

또한, 1070년(문종 24) 2월에는 삼층대전(三層大殿)인 자씨전(慈氏殿: 彌勒殿)을 새로 짓고 6월에는 절 주위에 성벽을 쌓게 하였으며, 1077년 봄에는 금자화엄경(金字華嚴經)을 전성(轉成)하였다.

1078년에는 금탑을 조성하였는데 금 144근, 은 427근으로 만들어졌다. 아울러 이 금탑을 보호하기 위하여 석탑을 조성하였는데, 숙종 때 송나라 조정에서 보내온 대장경을 이 탑 속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문종이 죽은 뒤에는 문종의 진영(眞影)을 모셨으며, 그 뒤 고려의 여러 왕들이 자주 행차하였다.

이 절은 웅대한 건축구조나 장엄보다도 교장(敎藏)의 간행사업이 진행되고 실현된 사찰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깊다. 의천(義天)은 이 절의 초대 주지직을 맡았으며, 1086년(선종 3) 교장도감(敎藏都鑑)을 설치하여 교장 간행 사업을 진행하였다. 1087년(선종 4)에 세워진 대장전도 의천의 교장(敎藏) 간행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그 뒤 이 절에는 무신정권의 실력자인 최충헌(崔忠獻)의 아들 최이(崔怡)가 황금 200근으로 13층탑과 화병(花甁)을 조성하여 헌납하였다. 그러나 충렬왕 때에 왕비가 왕과 함께 이 절에 와서 황금탑을 보고는 욕심을 내어 금탑을 빼앗아 대궐로 가져왔는데, 장식품들은 제국공주(齊國公主)의 노비들이 훔치고 탑은 공주가 차지하였다.

흥왕사 승려들은 간절히 되돌려 주기를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는데, 별안간 왕이 괴질에 걸려 백약이 효험이 없게 되자 공주는 금탑을 흥왕사로 돌려 주었고, 왕의 병도 완쾌되었다고 한다.

이 절은 몽고의 병란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그 뒤 여러 차례 중창하였으나 완벽하지 못하였고, 1330년(충숙왕 17)에 정조(晶照) · 달환(達幻) 등의 화엄종 고승들이 9년 동안 공사하여 이전의 면모를 되찾을 수 있었다. 또한, 공민왕 때는 이 절에서 왕을 시해하려는 음모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즉, 홍건적이 대거 침입하자 공민왕은 잠시 복주(福州)와 청주(淸州)로 피신한 일이 있었으나 난이 진압되자 환도하여 잠시 흥왕사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때 왕의 신임이 두터웠던 김용(金鏞)이 역심을 품고 무리들과 함께 이 절에 침범하여 시위를 죽이고 왕까지 시해하려 하였다.

공민왕은 다급히 태후 밀실로 피신하였고,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적도들의 칼을 막아 사직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때 환관 안도치(安都赤)가 공민왕과 용모가 비슷하였으므로 반도들이 그를 왕으로 오해하여 죽였다고 한다. 고려 왕실의 깊은 배려 속에서 크게 사세(寺勢)를 떨쳤던 이 절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폐허가 되었다.

옛터에는 초석과 이끼 낀 와당, 남문지(南門址) 밖의 입석(立石)만이 남아 있다. 절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삼중묘탑(三重妙塔)이 있는데 이는 송천사(松川寺)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한국사찰전서』(권상로 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송도의 고적』(고유섭, 열화당,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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