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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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에, 군부판서, 도첨의참리 등을 역임하였으며, 원나라에서 기황후를 설득하여 공민왕 폐위를 모의한 관리 · 공신.
이칭
이칭
티무르부카, 취성군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364년(공민왕 13)
본관
해주(海州)
출생지
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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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후기에, 군부판서, 도첨의참리 등을 역임하였으며, 원나라에서 기황후를 설득하여 공민왕 폐위를 모의한 관리 · 공신.
개설

본관은 해주(海州). 몽고 이름은 티무르부카[帖木兒不花]. 용주(龍州) 출신. 아버지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최안도(崔安道)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42년(충혜왕 복위 3) 군부판서(軍簿判書)로서 조적(曺頔)의 난에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시종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었고, 원나라에서 벼슬해 어사가 되었다. 이 때 재신(宰臣) 조분(趙芬)의 아내 마씨(馬氏)가 과부가 되자 상복을 벗기도 전에 강간했는데, 조분의 아우 환자(宦者) 빠이앤부카[伯顔不花]가 원나라에서 이 소식을 듣고 중정원(中政院)에 호소하였다.

이에 원제(元帝)가 겁설(怯薛: 원나라 숙위군사) 단려녀(旦驢女) 등을 보내 최유를 국문했으나, 호부(豪富)였기 때문에 곤장 57대를 맞는 데 그쳤다. 그 뒤 다시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석(尹碩)의 아내를 강간하는 등 횡포가 심하였다.

1345년(충목왕 1)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간 공로로 성근익대협찬보정공신(誠勤翊戴恊贊保定功臣)의 호를 받고 취성군(鷲城君)에 봉해졌다. 1346년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에 임명되었는데, 왕위 옹립에 자기보다 공이 많은 사람이 없음을 자부하고 벼슬에 불평을 품자 배전(裵佺)·민사평(閔思平)이 이를 꾸짖어 말렸다. 이에 화가 나 그들을 때렸다가 감찰사와 도첨의사(都僉議司)에서 탄핵을 하자 아우 최원(崔源)과 함께 원나라로 도망하였다.

그 뒤 1352년(공민왕 1) 왕이 원나라에 있다가 환국하게 되자 어가를 호종해 요동(遼東)에 이르렀다가 도망해 다시 원나라로 돌아가서, 김원지첩목아(金元之帖木兒) 등과 함께 고려 조정을 소란하게 하였다.

고려에서 군사 10만 명을 징발할 것을 원제에게 주청했고, 1354년 원나라에서 고우(高郵)에 진을 치고 있던 장사성(張士誠)을 정벌하기 위해 원제가 최유를 중상감승(中尙監丞)에 임명해 고려에 보내 군사를 독촉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최유를 회유하기 위해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제수하고,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 봉하였다.

1363년 원나라에 있으면서 그 나라의 승상 삭사감(搠思監)과 황후궁의 환자인 고려 사람 박불화(朴不花)에게 아첨해 장작동지(將作同知)·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다. 기황후(奇皇后)가 자기의 일족을 제거한 공민왕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또 고려에서는 김용(金鏞)이 안우(安祐) 등 여러 장수를 죽여 곤경에 처해 있어 내응하리라 믿고 고려에 대해 불평을 품고 있는 자들과 더불어 기황후를 달래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다음 해 1월 원나라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니 고려군이 패해 물러 나와 안주를 지켰다. 최유가 선주(宣州 :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에 들어가 웅거하자 왕은 최영(崔瑩)을 도순무사로 임명하고, 이성계(李成桂)에게 명해 정기(精騎) 1,000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응원하게 하니 토벌군의 사기가 올라 수주(隨州)의 달천(獺川)에서 싸워 크게 승리하였다. 이 때 압록강을 건너 도망간 자는 겨우 17기뿐이었다.

그 뒤 다시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려고 원제에게 원정군을 내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감찰어사 유련(紐憐) 등이 최유의 간사함을 폭로해 원정군을 정지할 것을 간하였다. 원제가 이를 받아들여 최유를 잡아 칼을 씌워 고려로 돌려보내니 마침내 사형에 처해졌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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