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이며,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윤만비(尹萬庇)의 아들이다. 시호는 영의(英毅).
충선왕 때 별장이 되었는데, 충숙왕이 세자로 있을 때부터 총애를 받았다. 충숙왕이 즉위하자 호군에 제수되고 왕의 폐행(嬖幸: 총애를 받은 신하)이 되었으며, 여러 번 관직을 옮겨 마침내 대언에 올랐다.
본래 시기심이 많고 아첨을 잘하여, 상왕(충선왕)의 미움을 사서 1317년(충숙 4) 4월 김해부(金海府)로 쫓겨났다. 그 뒤 조적(曺頔)일파에 붙어 국가에 해를 끼쳤다. 1320년(충숙왕 7) 총부전서(摠部典書)로서 천추사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와 밀직부사로 임명되었다.
1321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면서 왕이 원나라에 갈 때 유청신(柳淸臣) 등과 시종하였다. 상왕의 옛 신하인 권한공(權漢功) 등을 치죄하기도 하였다. 1324년 5월 평리(評理)에 오르고, 1326년 7월 원나라가 고려를 없애고 성(省)으로 만들려는 책동을 저지한 공로로 1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1327년 11월 시종한 신하들을 공신으로 책봉할 때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다시 1등 공신에 올랐다. 다음해 4월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졌다. 7월, 왕이 병이 들어 정사(政事)에 전념할 수 없게 되자 대언 봉천우(奉天祐) 등과 전주권(銓注權: 인사권)을 관장하다가 폐인(嬖人)들과 틈이 생겨 하옥되기도 하였으나, 12월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에 파견되었다.
1331년(충혜 1) 8월 중찬(中贊)으로 개배(改拜)되고 벽상삼한십자공신(壁上三韓十字功臣) 호를 받았다. 1332년(충숙 복위 1) 2월 전왕(충혜왕)의 총신으로 몰려 투옥되었다가 5월 원나라의 명으로 석방되었다. 1340년(충혜 복위 1) 4월 좌정승으로 승직되고, 1342년 6월 조적의 난을 진압한 뒤 다시 1등 공신이 되었다.
충목왕 초에 원나라의 폐신 고용보(高龍普)에게 부탁해 진국상장군고려도원수(鎭國上將軍高麗都元帥)를 받았다. 하지만 어사대의 탄핵으로 해평에 유배되어 1348년(충목 4) 5월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