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개성(開城). 증조는 양양공(襄陽公) 왕서(王恕), 조부는 시안공(始安公) 왕인(王絪)이고, 아버지는 서원후(西原侯) 왕영(王瑛)이다. 서흥후(瑞興侯)에 봉작되었다.
1301년(충렬왕 27) 원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할 때에 충렬왕과 충선왕의 부자 사이를 이간하려는 무리들에 의해 충렬왕의 뒤를 잇게 하려는 책동이 있었다.
즉 왕유소(王惟紹) 등은 당시 충렬왕 부자간이 원만하지 못하고, 또 충선왕과 왕비인 보탑실련공주(寶塔實憐公主)와 사이가 좋지 못한 점을 이용하여 공주를 이혼시켜 전에게 개가시키고 고려왕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는 충렬왕에게까지 어느 정도 승인을 받고 1303년 충렬왕이 직접 원에 가서 개가문제를 승인받으려고 했으나 최유엄(崔有渰)이 충렬왕에게 간곡하게 간하고, 홍자번(洪子藩) 등이 중서성(中書省)에 나가 왕유소 등의 처벌을 요구함으로써 일이 중지되었다.
이 때 충선왕은 연경(燕京)에 있으면서 원의 왕위계승문제에 가담하여 무종(武宗)의 옹립에 성공함으로써 더 이상 왕전 일파는 힘을 쓰지 못하고, 왕 부자를 이간하던 왕유소·송방영(宋邦英)은 처형되었으며, 충선왕은 왕전을 용서하려고 하였지만 대세에 몰려 연경의 문명문(文明門) 밖에서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