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왕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시대, 제25대(재위: 1274~1308) 왕.
이칭
시호
충렬(忠烈)
성명
왕거(王昛)
초명
왕심(王諶), 왕춘(王賰)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236년(고종 23)
사망 연도
1308년(충렬왕 34)
본관
개성(開城)
주요 관직
국왕
관련 사건
원종폐위사건|일본원정|합단(合丹)의 침입|동녕부 반환|탐라총관부 반환|관제개편|충선왕 폐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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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충렬왕은 고려 제25대(재위: 1274~1308) 왕이다. 무신 집권자에 의해 폐위된 부왕을 복위시키는 과정에서 몽골 공주와 혼인하였다. 몽골 측 지적에 따라 고려의 관제를 개편하였고, 몽골의 1·2차 일본 원정에 조력하면서 정동행성 장관직을 겸하게 되었다. 원 정국 변동 과정에서 왕위를 아들 충선왕에게 물려주었다가 다시 왕위에 오른 후에는 그 지지 세력이 충선왕 지지 세력과 벌이는 정쟁이 지속되었다. 정쟁에서 패한 후 1308년(충렬왕 34) 사망하였다.

정의
고려시대, 제25대(재위: 1274~1308) 왕.
가계 및 인적사항

재위 1274년∼1308년. 이름은 왕거(王昛), 처음 이름은 왕심(王諶) · 왕춘(王賰). 원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추밀부사(樞密副使) 김약선(金若先)의 딸 순경태후(順敬太后) 김 씨이다. 비는 원(元) 세조(世祖)의 딸 장목왕후(莊穆王后), 즉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이며, 공주와 혼인하기 전에 시안공 왕인(始安公 王絪)의 딸 정화궁주(貞和宮主)를 맞이하였고, 공주 사후에 숙창원비(淑昌院妃) 김씨를 맞이하였다.

주요 활동

1236년(고종 23)생으로, 1259년(고종 46) 고종이 사망하였을 때, 태자로서 몽골에 가 있던 아버지를 대신하여 태손(太孫)으로서 임시로 국사(國事)를 처리했다. 1260년(원종 1) 태자(太子)로 책봉되었다. 1269년(원종 10) 무신 집권자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위시키는 일이 발생하자, 세조(世祖) 쿠빌라이에게 부왕의 복위를 위한 군대를 요청하는 한편으로 황실 여성과의 혼인을 요청하였다. 1272년(원종 13) 혼인을 허락받고 귀국하면서 몽골식 머리 모양인 변발(辮髮)을 하고 그들의 의복인 호복(胡服)을 입어 고려인들이 탄식했다고 한다. 1274년(원종 15) 원에서 세조 쿠빌라이의 딸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 쿠틀룩켈미쉬) 공주, 즉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고, 이듬해 원종이 사망하자 귀국해 왕위에 올랐다. 황실과의 통혼을 비롯한 몽골과의 관계는 충렬왕이 즉위 후 그간 무신 집권기를 거치며 약화된 국왕권을 재구축하는 데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고려의 정치가 몽골의 영향을 받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즉위 년인 1274년(충렬왕 즉위년) 10월, 제1차 일본 원정이 실행되어 여원 연합군이 합포(合浦: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에서 출정하였다. 김방경(金方慶)이 이끈 고려군은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폭풍을 만나 본토 정벌에는 실패하였다. 1차 원정이 실패한 후, 원에서는 2차 원정 준비를 위해 1280년(충렬왕 6) 고려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하고 1차 원정을 이끌었던 원나라 측 군관인 흔도(忻都, 힌두)와 홍다구(洪茶丘)를 행성의 우승(右丞)으로 임명해 보냈다. 이에 충렬왕은 스스로 그 장관인 승상(丞相)직을 맡기를 요청하여 허락받았다. 1281년에 감행된 2차 원정도 실패로 끝났다. 이후로도 원정 준비는 계속되다가 1294년(충렬왕 20) 원 세조가 사망한 후 원정 계획은 철회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정동행성은 유지되었고, 고려 국왕은 계속해서 그 승상직을 겸하였다.

1275년(충렬왕 1) 고려의 관제(官制)가 원의 그것과 같아 참월하다는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지적에 따라 관제를 개편하여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상서성(尙書省)을 합쳐 첨의부(僉議府)로, 추밀원(樞密院)밀직사(密直司)로, 어사대(御史臺)감찰사(監察司)로 고쳤다. 육부(六部)전리사(典理司) · 군부사(軍簿司) · 판도사(版圖司) · 전법사(典法司)로 폐합, 변경하였다. 이외에도 조(祖) · 종(宗) 대신에 왕(王)으로 칭하고 충성을 뜻하는 ‘충(忠)’자를 붙이게 되었고, 선지(宣旨)는 왕지(王旨)로, 짐(朕)은 고(孤)로, 사(赦)는 유(宥)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太子)는 세자(世子)로 칭하게 되었다. 이밖에 몽골 직제의 영향으로 생겨난 관직도 있었다. 몽골식 기병이 야간 순찰을 도는 순마소(巡馬所), 매 잡는 것을 임무로 하는 응방(鷹坊), 홀치[忽赤, 忽只] 등이 그것이다. 또한 충렬왕 본인이 변발과 호복을 하면서 고려의 신료들도 모두 변발과 호복을 하게 되었으며, 제국대장공주와 그를 따라온 겁령구(怯怜口: 사속인(私屬人))들을 통해 고려 왕실에 몽골의 풍속 · 언어 등이 퍼지기도 하였다.

1278년(충렬왕 4)에는 원 조정에 가서 세조 쿠빌라이를 만나 그 전년에 발생한 김방경 무고 사건을 해결하는 한편, 1차 원정 이후 고려에 주둔하고 있던 몽골군의 철수를 요청하여 허락받았으며, 원종 복위 이후 고려에 두어졌던 다루가치 또한 철수를 허락받았다. 1290년(충렬왕 16)에는 1269년(원종 10) 원종이 폐위된 사건을 구실로, 최탄(崔坦) 등이 서경(西京)의 땅과 민을 들어 몽골에 귀부한 데에 따라 몽골의 관부인 동녕부가 설치되어 있었던 서경 지역의 반환을 세조 쿠빌라이에게 요청하여 허락받고, 여기에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을 설치하였다. 또한 1294년(충렬왕 20)에는 삼별초(三別抄)의 최후 근거지로 몽골에 함락된 후 몽골의 직할령이 되었던 탐라를 돌려줄 것을 원 성종(成宗)에게 요청하여 돌려받아, 이를 제주라 하고 목사(牧使)를 파견하였다. 이후 1300년(충렬왕 26) 원에서는 다시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했는데, 1301년(충렬왕 27) 이를 만호부(萬戶府)로 고칠 것을 요청하여 탐라만호부가 설치되었고, 이는 정동행성에 소속되어 운영되었다.

1297년(충렬왕 23) 국왕위를 세자에게 넘길 것을 원 황제에게 요청하여 허락받고, 1298년(충렬왕 24) 정월 왕위에서 물러나 태상왕(太上王)이 되었으며, 원나라에서 부마상주국일수왕(駙馬上柱國逸壽王)의 호를 받았다. 충렬왕이 선위를 요청한 것은 1294년 원에서 세조가 사망하고 성종이 즉위한 이후의 정국 변동과 관련된다. 성종 즉위 후 원과의 관계가 경색되는 가운데 고려에서는 세자를 전면에 내세웠고, 뒤에 충선왕이 되는 세자는 1296년(충렬왕 22) 성종의 조카딸인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와 혼인하였다. 이어 1297년 제국대장공주가 사망하자, 세자는 그 원인을 충렬왕의 측근 세력에게 돌려 대거 처형 및 처벌하였고, 평소 충렬왕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세력들이 세자를 중심으로 모이는 가운데, 충렬왕은 선위를 결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충선왕은 즉위한 해 8월, 왕비인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로 인해 발생한 ‘조비 무고 사건’ 및 관제 개편에 대한 문제 제기로 폐위되어 원으로 소환되었고, 충렬왕이 다시 왕위에 올랐다.

충렬왕이 복위한 후, 왕유소(王惟紹) · 송린(宋璘) 등이 주축이 된 충렬왕의 측근 세력들은 충선왕이 복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기 위한 방편으로, 그 부마로서의 지위를 박탈하고자 하여 계국대장공주를 고려 방계 종실인 서흥후(瑞興侯) 왕전(王琠)에게 개가(改嫁)시키려고 하였다. 충렬왕 또한 이에 동조하여, 1305년(충렬왕 31)에는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 직접 원 조정으로 가기까지 하였다. 이후 충렬왕 및 그 지지 세력은 원에 있던 충선왕 및 충선왕 지지 세력과 원 조정에서 소송에까지 이르는 정쟁을 지속했으나, 원 조정에서는 충선왕 측의 손을 들어 주었다. 또한 1307년(충렬왕 33) 원 성종이 사망하고 무종(武宗)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충선왕이 무종을 옹립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고려 정치에서도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서, 충렬왕은 권력을 빼앗긴 채 왕위에 있다가 1308년(충렬왕 34)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능은 경릉(慶陵: 경기도 개성 소재)이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원사(元史)』

단행본

김광철, 『원간섭기 고려의 측근정치와 개혁정치』(경인문화사, 2018)
이명미, 『13~14세기 고려·몽골 관계 연구: 정동행성승상 부마 고려국왕, 그 복합적 위상에 대한 탐구』(혜안, 2016)

논문

이익주, 『고려·원관계의 구조와 고려후기 정치체제』(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6)
이명미, 「충렬왕 복위 연간 정치세력 분기의 양상: 김방경 사후 예장 철회 사건으로부터」(『역사문화연구』 70,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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