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행성은 고려 후기 몽골 제국에서 고려에 설치한 지방 행정 기구이다. 1280년(충렬왕 6)에 처음 설치되어 일시적으로 치폐를 거친 후 몽골 제국 말기까지 존속하였다. 초기에는 몽골 제국이 추진한 일본 원정의 전방 지원 사령부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쿠빌라이 사후에는 군사적 성격은 약해지고 내지의 일반적인 지방 행정 기구와 같은 위상을 가지면서, 고려와 몽골 제국 사이의 연락 기구로서 기능하였다. 고려 국왕은 자동적으로 정동행성의 승상을 겸직했으며, 하위 관리는 국왕의 천거를 받아 몽골 황제가 임명하였다.
몽골 제국은 정복한 지역을 몇 개의 단위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이 가운데 중국 지역을 분할한 지방 통치 기구의 명칭이 행성(行省), 즉 행중서성(行中書省)이다. 행중서성이란 중앙의 최고 기관인 중서성의 파출 기구라는 뜻이다.
애초에 행성은 특정한 군사 작전을 실행할 때 그를 준비하기 위한 기관으로 설치되기도 했는데, 이를 군전행성(軍前行省)이라고 부른다. 1280년(충렬왕 6)에 고려에 처음 설치된 정동행성은 이듬해 이루어진 제2차 일본 원정을 대비하기 위한 기구였다. 정동(征東)이란 일본을 원정한다는 뜻이다. 이해 10월 쿠빌라이는 충렬왕(忠烈王)을 정동행성의 좌승상(左丞相)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고려 전역을 정동행성의 관할 구역으로 삼는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일본 원정을 위한 군사 지원 업무를 충렬왕에게 맡겼다고 해석하는 편이 타당하다. 이때의 첫 번째 정동행성은 일본 원정이 끝난 직후 1282년(충렬왕 8) 1월에 폐지되었다.
몽골 제국 정부는 일본 원정을 다시 추진하면서 1283년(충렬왕 9)에 정동행성을 다시 설치하고, 그해 4월에 충렬왕을 좌승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고려에 전쟁 준비 업무가 크게 부여되지 않았다. 중국의 강남(江南), 즉 남송(南宋)의 영역에서 주로 이루어지던 전쟁 준비의 진행 여부에 따라 이때의 정동행성은 설치와 폐지를 반복했는데, 충렬왕은 그와 무관하게 행성 장관의 지위를 계속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1287년(충렬왕 13) 5월에는 충렬왕의 직위가 행상서성(行尙書省) 평장정사(平章政事)로, 이듬해 2월에는 행상서성 좌승상으로 변경되었다. 이는 몽골 제국 내부에서 중앙 정부의 최고 기구가 중서성에서 상서성(尙書省)으로 바뀐 데 따른 후속 조치였다. 이후 1291년(충렬왕 17) 5월에는 그 명칭이 정동행중서성으로 복원되었다. 역시 중앙 정부의 변동에 따른 것이었다.
이 무렵 몽골 제국 내에서 각 행성은 점차 임시 기구의 성격에서 상설 지방 행정 기구로 변화해 갔다. 이에 따라 정동행성 역시 애초의 군사적인 목적 이외에도 내지의 행성들과 마찬가지로 각종 속사(屬司)를 두면서 기능을 확대해 갔다. 이러한 경향은 쿠빌라이 사후에 몽골 제국이 일본 원정을 단념함에 따라 더욱 분명해졌다. 이후 정동행성 역시 군사 지원 업무는 더 이상 수행하지 않고, 일반적인 행성과 비슷하게 일상적인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기구로 변모하였다.
정동행성은 몽골 제국 말까지 명의상 엄연한 관서로서 존속되었다. 승상은 고려왕이 겸임했고, 승상 아래에는 평장정사 · 우승 · 좌승 · 참지정사 · 원외랑(員外郎) · 낭중(郎中) · 도사(都事) 등이 있었다. 속사(屬司)로는 유학제거사(儒學提擧司), 검교소(檢校所), 조마소(照磨所), 가각고(架閣庫), 이문소, 도진무사(都鎭撫司) 등이 있었다. 정동행성은 독자적인 관서 건물을 가지고 있었으며, 관원은 많을 때에는 수백 명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몽골 제국에서 직접 임명하여 파견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평장정사 이하 참지정사까지의 고위직은 거의 항상 비어 있었고, 낭중 · 원외랑 · 도사와 같은 하급 직위만이 채워져 있었다. 정동행성의 관원은 원칙적으로 몽골 황제가 임명하였지만 고려 국왕의 천거를 그대로 승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정동행성을 형식상 · 의례상의 기구라고 하는 평가는 이런 점에서도 나타났다.
정동행성은 때때로 고려 정부와 별도로 몽골에 하성절사(賀聖節使)나 하정사(賀正使) 등 의례적 목적의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국왕이 입조(入朝)하는 등의 이유로 장기간 자리를 비울 때에는 권서정동행성사(權署征東行省事)를 임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정동행성이 일시적이나마 실질적인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정동행성의 주요 기능 가운데 하나는 몽골 제국 중앙 정부와의 연락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즉 몽골 제국 정부는 고려와의 소통 채널로 정동행성의 존재를 활용했던 것이다. 고려 국왕은 몽골 제국 황제나 중앙 정부의 중서성과 직접 문서를 주고받기도 하였으나, 그보다는 훨씬 잦은 빈도로 정동행성 명의로 중서성과 소통하였다. 1281년부터 고려 국왕은 정동행성의 장관 명의로 중앙 정부의 중서성과 평행 문서인 자문(咨文)을 주고받았다. 요양행성과 같은 몽골 제국의 다른 행성들 역시 정동행성을 소통 창구로 삼았다. 특히 고려-몽골 관계의 후기로 갈수록 정동행성의 외교 관련 업무는 점차 증가하여, 고려의 관료들이 몽골 측에 전달할 사항이 있으면 정동행성을 매개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동시에 정동행성은 몽골 제국 내에서 고려의 지위를 규정하는 기능을 하기도 했다. 즉 고려 국왕은 정동행성의 승상을 겸임함으로써, 외국의 군주이면서도 동시에 몽골 제국의 고위 관료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 정부 관서나 관원들의 위계, 고려에서 시행하는 의례의 격식 역시 몽골 제국 관료 제도의 그것에 준하여 설정될 수 있었다.
몽골 제국은 때에 따라 정동행성을 통해 고려의 내정에 깊숙이 관여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시기가 충렬왕 말년의 이른바 정동행성 증치기(增置期)이다. 1298년(충렬왕 24)에는 충선왕이 잠시 즉위했다가 곧바로 물러나고 충렬왕이 복위하는 등의 정치적 변동이 있었다. 이후 충렬왕과 충선왕 양쪽 세력이 거세게 충돌하자 몽골 정부는 고려 정치에 직접 개입하였다. 1299년(충렬왕 25)에 몽골은 활리길시(闊里吉思, 고르기스)와 야율희일(耶律希逸), 왕사렴(王思廉)을 각각 정동행성 평장정사와 우승(右丞),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임명하고 고려에 파견하여 행성의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들은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고려의 사회 · 경제 문제 등 국정 전반을 직접 관할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려 지배층의 격렬한 반발 끝에 결국 활리길사 등은 1년여 만에 원으로 귀환하였다.
충선왕 대 이후로는 요양(遼陽)의 고려인이나 심왕(瀋王)의 지지 세력 등이 주도하여 정동행성을 요양행성(遼陽行省)과 합치자거나, 아예 폐지하여 내지의 행성과 같게 만들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른바 입성책동(立省策動)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몽골 제국 내부에서도 널리 지지를 얻지 못했고 또한 고려 측의 맹렬한 반대로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1340년대 이후에는 정동행성 가운데 사법 기능을 담당한 이문소(理問所)가 여러 차례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이문소는 독자적인 형옥(刑獄)을 갖춘 채 개경에서의 대몽골 관계에서 일어나는 범죄 행위를 다스리는 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몽골과 결탁한 세력들의 불법과 전횡을 옹호하면서 그들에 반대하는 세력을 억누르는 권력 기관으로 활동하였다. 이에 1356년(공민왕 5)에 반원 개혁의 첫 조처의 하나로 이문소가 타파의 대상이 되었다.
정동행성은 초기에는 일본 원정을 위한 전방 사령부로 설치되었으나 쿠빌라이 사후에는 군사적 기능은 크게 줄어들고 대체로 의례적, 형식적으로 몽골 제국의 지방 행정 기구로서 존치되었다. 정동행성이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기 위한 기관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비록 형식상의 자리였을지라도 고려 국왕이 승상을 겸직했다는 점, 평장정사 등 고위 관직은 거의 비워 두었다는 점, 행성의 관리를 천거하는 권한도 국왕이 가지고 있었던 점 등에서 그러하다.
정동행성은 외국인 고려에 설치된 국내의 지방 행정 기구라는 매우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 국왕은 외국의 군주이면서 동시에 몽골 제국 관료제의 구성원이라는 이중적인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이 점은 고려와 몽골의 외교 제도, 의례 등을 설정하는 데 기본적인 원칙을 제공했다. 즉 몽골 제국이 외국을 상대하는 데에도 자국 관료제의 운영 원리를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논리적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이후 고려와 명나라의 외교 관계에 그대로 계승되었고, 나아가 명나라가 다른 외국을 상대하는 데에도 확대 적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