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왕은 고려 후기 심주(瀋州)·요양(遼陽)의 고려인들을 통치하기 위해 원에서 고려의 왕족에게 수여한 봉호(封號)이다.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는 심주와 요양 일대에 심양등로안무고려군민총관부가 설치되었다. 1307년에 원 무종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운 충선왕이 심양왕에 분봉되고 이곳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1310년에 심왕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313년 고려의 국왕과 심왕을 겸하였던 충선왕이 고려왕위는 충숙왕에게, 심왕위는 왕고에게 양위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후 심왕이 고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심왕옹립운동이 일어나면서 고려 국왕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몽고와의 전쟁 중에 많은 고려인들이 유망하거나 귀부해 이들 지역에 살았다. 이에 원에서는 이곳에 안무고려군민총관부(安撫高麗軍民總管府)를 두고 홍복원(洪福源)의 후손들로 요양을, 고려 왕족인 왕준(王綧) 및 그 후손들로 심주를 각각 통치하게 하였다.
1296년(충렬왕 22)에 둘을 합쳐 심양등로안무고려군민총관부(瀋陽等路安撫高麗軍民總管府)를 설치하였다.
1307년(충렬왕 33)에 충선왕이 원에서 무종(武宗)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우자, 이듬해 충선왕을 심양왕(瀋陽王)으로 삼아 이 지역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1310년(충선왕 2)에 이것이 심왕으로 고쳐졌다.
원나라에서 왕족 · 부마들에게 진봉(進封)했던 제왕(諸王)의 반열에 들어 금인수뉴(金印獸紐)를 받았으며, 제왕 가운데 서열은 39위로서 41위인 고려 국왕보다 상위에 있었다.
고려 국왕과 심왕을 겸했던 충선왕이 1313년(충선왕 5)에 고려 왕위를 아들 충숙왕에게, 1316년(충숙왕 3)에는 심왕위를 조카인 왕고(王暠)에게 각각 양위함으로써 이들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는 주로 심왕이 고려 왕위를 차지하려는 이른바 심왕옹립운동으로 나타났다.
먼저 1321년(충숙왕 8)에 원에서 영종(英宗)의 후원을 받는 심왕 고를 고려왕으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권한공(權漢功) · 채홍철(蔡洪哲) · 채하중(蔡河中) · 조적(曺頔) 등이 심왕당(瀋王黨)을 형성하고 이를 적극 추진하였다.
이때 충숙왕은 심왕 고의 참소를 받아 국왕인(國王印)을 빼앗기고 원에 억류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때마침 영종이 살해되고 태정제(泰定帝)가 즉위함으로써 심왕옹립운동은 좌절되었다. 1339년(충숙왕 복위 8)에도 충숙왕이 죽자,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심왕 고와 충혜왕이 대립해 다시 심왕옹립운동이 일어났다.
이때에는 조적 등 심왕당이 원의 태사(太師) 백안(伯顔)의 후원을 받으면서 충혜왕과 무력충돌을 일으켰을 만큼 치열하였다. 그러나 충혜왕이 승리함으로써 심왕옹립운동은 또다시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잔당들이 원에서 충혜왕을 참소해 원으로 잡혀가는 고초를 겪었다.
1345년(충목왕 1)에 심왕 고가 죽자, 공석으로 있다가 1354년(공민왕 3)에 그의 손자인 독타불화(篤朶不花 : 脫脫不化)가 심왕에 봉해졌다. 그리고 이후로는 심왕이 고려 왕위를 엿보는 일이 거의 없었다.
다만, 1356년(공민왕 5)에 고려에서 반원운동을 일으켜 기철(奇轍) 등 부원배들을 죽이자, 기철의 누이인 원의 기황후 등이 이에 반발해 공민왕을 폐하고 심왕 독타불화를 옹립하려 했으나 본인이 사양함으로써 좌절되었다.
그리고 1374년에도 공민왕이 죽자, 북원(北元)에서 역시 심왕 독타불화를 고려 국왕에 봉했지만, 이때는 이미 원의 영향력이 대단히 축소되어 있었으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376년(우왕 2)에 심왕 독타불화가 죽은 뒤 새로운 책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폐지된 듯하다.
심왕은 고려 국왕과 경쟁하면서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원이 심왕을 설치하고 고려 왕족을 이에 책봉한 것은 고려를 효과적으로 간섭하기 위한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고려사』 예지(禮志)에는 충렬왕이 즉위하기 이전에 심왕에 봉해졌던 것으로 되어 있고, 『원사(元史)』에는 1307년에 충렬왕이 심양왕으로 진봉되었다고 하나, 이는 기록상의 잘못일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