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원정치는 고려 후기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펼친 고려의 정치활동이다. 1270년 개경환도에 반발한 삼별초의 항쟁과 충선왕의 개혁, 총목왕의 정치도감 개혁 등을 반원적 행동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본격적인 반원정책은 1356년 공민왕이 원을 배경으로 권세를 부려온 부원세력을 제거하면서 시작되었다. 공민왕은 고려의 내정에 간섭한 정동행성 이문소를 혁파하여 사법권을 회복하였고, 쌍성총관부를 수복하였다. 원의 연호를 정지하고 관제를 대폭 개정하여 황제국 체제를 회복하였다. 국왕의 측근 세력이 주도하였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된다.
원간섭기의 개시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하나는 고려가 몽고에 항복한 1259년(고종 46) 4월부터 시작되었다고도 보는 견해이다. 다른 하나는 무신정권이 붕괴하면서 고려 정부가 강도(江都)에서 개경으로 환도(還都)한 1270년(원종 11) 5월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기는 견해이다. 학계에서는 후자가 다수설을 이루고 있다. 만일 후자의 견해를 수용한다면 1270년 6월 개경환도에 반발해 장군 배중손(裵仲孫) 등이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해서 몽고에 저항한 삼별초(三別抄)의 항쟁을 반원정치의 기원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충렬왕의 정치를 친원정책으로 규정하고 충선왕의 개혁을 반원정치로 보는 견해와 충목왕대 정치도감(整治都監)의 개혁을 반원적 성격을 띤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이러한 부류는 이른바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의 활동과 연관지어 각광을 받아왔다. 그러나 근래 그러한 개혁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되면서 반원정치로 보기 어렵다는 쪽으로 의견이 수렴되고 있다. 공민왕 원년에 감찰대부(監察大夫) 이연종(李衍宗)이 왕의 변발(辮髮)과 호복(胡服)을 선왕의 제도가 아니라며 본받지 말기를 간언하자 공민왕이 변발을 풀었다. 이를 반원적 행동으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본격적인 반원정책으로 규정하기에는 미흡하다. 공민왕이 1356년(공민왕 5)에 추진한 일련의 개혁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반원정치로 볼 수 있다.
반원정치는 공민왕이 1356년(공민왕 5)에 부원세력(附元勢力)을 제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공민왕은 밀직(密直) 강중경(姜仲卿), 대호군(大護軍) 목인길(睦仁吉), 우달치(亏達赤) 이몽고대(李蒙古大) 등으로 하여금 태사도(太司徒) 기철(奇轍), 태감(太監) 권겸(權謙) 및 경양부원군 노책(盧頙) 등을 참살하였다. 이때 기철의 아들 기유걸 등을 체포하도록 명령했고 기철 · 권겸 · 노책 세 집안의 노비를 몰수했다. 원을 배경으로 왕권을 위협하며 권세를 부려온 부원세력은 일시에 숙청되었다. 같은 해 공민왕은 고려의 내정에 간섭해온 대표적 기구인 정동행성(征東行省) 이문소(理問所)를 혁파함으로써 사법권을 회복하였다.
한편 국토회복을 위해 평리(評里) 인당(印瑭)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삼아 압록강 서쪽 8참(站)을 공격하게 했고,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수복하게 했다. 원의 군사지휘 체계인 제군(諸軍)의 만호(萬戶), 진무(鎭撫), 천호(千戶), 백호(百戶)의 패(牌)를 몰수했다. 같은 해 6월에 인당이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파사부(婆娑府) 등 3참(站)을 공격해 격파했다.
같은 달에 공민왕은 원의 지정(至正) 연호를 정지했는데 이는 원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아울러 교서를 반포해 원을 등에 업고 세력을 떨친 기철 등을 비난해 그들에 대한 숙청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그들이 점탈한 인민 중에 양가(良家) 자녀는 그 부모에게 돌려주고 그들이 점탈한 민호는 공역(公役)을 지게 했다. 원의 보복 위협이 커지자 군사력 강화를 위해 7월에 충용(忠勇) 4위(衛)를 설치했다.
또한 공민왕은 관제를 대폭 개정했다. 원간섭기에 격하된 관청의 위상을 문종 구제(舊制) 즉 황제국 체제의 관제로 되돌렸다.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를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으로, 밀직사(密直司)를 추밀원(樞密院)으로 회복했고, 첨의부(僉議府)에 병합되어 없어졌던 상서성(尙書省)을 다시 설치했으며, 4사(司)로 축소 격하되었던 6부(部)를 회복했다. 그리고 감찰사(監察司, 司憲府)를 어사대(御史臺)로, 예문관(藝文館)을 한림원(翰林院)으로, 성균관(成均館)을 국자감(國子監)으로 되돌렸다.
공민왕의 고토 수복 명령을 받은 동북면병마사 유인우는 이자춘(李子春) · 이성계(李成桂) 부자의 호응을 얻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였다. 이때 쌍성총관부 총관 조소생(趙小生), 천호 탁도경(卓都卿)이 달아났으며, 화주(和州) · 등주(登州) · 정주(定州) · 장주(長州) · 예주(預州) · 고주(高州) · 문주(文州) · 의주(宜州) 및 선덕진(宣德鎭), 원흥진(元興鎭), 영인진(寧仁鎭), 요덕진(耀德鎭), 정변진(靜邊鎭) 등을 수복했다. 함주(咸州) 이북은 고종대인 1258년(고종 45)에 원에 빼앗겼다가 이때 모두 되찾은 것이다. 그런데 원이 단사관(斷事官)을 보내 원의 영토를 침범한 책임을 추궁하자 공민왕은 압록강을 넘은 책임을 서북면병마사 인당에게 전가해 그를 베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반원정치를 수행하였던 홍언박(洪彦博)을 면직하고 윤환(尹桓), 허백(許伯), 유탁(柳濯)을 유배보냈다. 그 대신 이제현(李齊賢)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염제신(廉悌臣)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경천흥(慶千興)을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로 삼았다. 이러한 인사조치 역시 홍언박 등에게 반원정책의 책임을 전가한 것이었다. 이는 공민왕이 반원개혁과 그에 수반해 반원군사정책을 추진하다가 원의 보복을 우려해 정치적으로 한발 뒤로 물러선 것이다.
공민왕이 1356년 반원정치를 단행할 수 있었던 배경은 원이 중국 한족(漢族)의 반란으로 내치(內治)가 어지러웠기 때문이었다. 공민왕의 반원정치에는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공민왕이 부원세력을 숙청하고 반원정치를 펼친 것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이었다. 아울러 고려 국왕의 왕권을 강화하려는 운동이었으며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1356년의 반원개혁은 홍언박을 정점으로 하는 외척세력과 연저시종공신(燕邸侍從功臣)을 중심으로 한 국왕 측근세력이 주도했기 때문에 원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했으나 다른 부분에서는 실패한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부원세력 숙청, 쌍성총관부 수복 등 원의 간섭에서 최초로 탈피한 것만으로도 공민왕의 반원정치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