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춘경(春卿). 호는 성재(誠齋). 고흥부원군(高興府院君) 유청신(柳淸臣)의 손자이며, 판밀직사(判密直事) 유유기(柳攸基 또는 柳有奇)의 아들이다.
문음(門蔭)으로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하고 귀국, 1337년(충숙왕 6) 감문위대호군(監門衛大護軍)이 된 뒤 고흥군(高興君)에 봉해졌다. 1344년(충혜왕 복위 5) 원나라에 의해서 합포만호(合浦萬戶)가 되었다.
1345년(충목왕 1)에 밀직부사가 되었고, 1348년에는 평리(評理)로서 사신이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1349년(충정왕 1)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가 되어 추성양절익조공신(推誠亮節翊祚功臣)의 칭호를 받았고, 이듬해 전라도 · 양광도 도순문사(全羅道楊廣道都巡問使)를 겸해 왜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1351년 찬성사가 되었다.
공민왕 초에는 전라도만호로 왜구들의 침입을 막았으며, 「장생포(長生浦)」 등의 곡(曲)을 지어 악부(樂府)에 올렸다. 1352년(공민왕 1) 찬성사 판삼사사(贊成事判三司事)를 역임하고, 1353년(공민왕 2)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1354년(공민왕 3) 좌정승에 올라 고흥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장사성(張士誠)을 토벌하기 위하해 원나라에서 징병을 하자 염제신(廉悌臣)과 함께 군사 2,000명을 이끌고 참전해 공을 세웠다. 1356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으나 곧 유배되었다.
그러다 다시 기용되어 1360년 경기병마도통사가 되어 왜구의 침입을 방비하고 고흥후(高興侯)에 봉하여 졌다. 이듬해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안동으로 남행(南幸)을 하게 되자 도솔원(兜率院)까지 호종하고 경상도도순문사 겸 병마사가 되었다.
1362년 좌정승에 올라 서북면홍적방어제군도통사(西北面紅賊防禦諸軍都統使)가 되었고, 이듬해 흥왕사(興王寺)의 변(變)을 진압해 1등공신이 되었다. 이 해에 다시 좌정승 · 우정승을 거쳐 1365년에는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을 역임하였다.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죽은 뒤 추충병의동덕보리익조공신(推忠秉義同德輔理翊祚功臣)에 올랐다.
1368년 안극인(安克仁) · 정사도(鄭思道)와 함께 노국대장공주의 영전을 마암(馬巖)에 크게 신축하는 일에 강력하게 반대하다가 투옥되고 시중에서 파면되었다. 왕과 신돈(辛旽)이 죽이려 했으나 이색(李穡)의 간쟁으로 석방되었다.
1371년 신돈이 죽자 노국대장공주의 장사(葬事)에 박례(薄禮)를 주장하다 헌사(憲司)에 의해 탄핵을 받아 청교역(靑郊驛)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조선개국 후 보국고흥백(輔國高興伯)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