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돈은 오늘날 경상남도 창녕 지역에 해당하는 영산현(靈山縣)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편조(遍照), 자(字)는 요공(耀空), 법호는 청한거사(淸閑居士)이다. 그의 아버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신씨가 영산현의 토성(土姓)이었다는 점에서 이 지역의 재지세력(在地勢力)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머니는 계성현(桂城縣) 소재의 옥천사(玉川寺) 노비였다고 하는데, 신돈이 승려였고 뒤에 역신으로 몰림으로써 그 신분이 비하된 것일 수 있다.
신돈의 가계에 대해서는 『영산신씨족보』 등 관련 자료에서 신돈의 존재를 전하지 않아서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족보의 영산신씨 가계 가운데 초당공파(草堂公派)로 알려진 신혁(辛革, 9세) → 신원경(辛原慶, 10세) → 신예(辛裔, 11세) · 신부(辛富) · 신순(辛珣) · 신귀(辛貴)로 이어지는 가계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예와 신부는 공민왕 초까지 활동하였으며, 신순과 신귀는 신돈의 당여(黨與)로 지목되어 신돈이 처형될 때 함께 주살당하였다. 신원경의 딸은 신종(神宗)의 왕자 양양공(襄陽公) 왕서(王恕)의 증손인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의 처이다.
신돈은 어려서부터 승려가 되었다. 그가 승려로서 일찍이 인연을 맺은 사찰은 계성현의 옥천사였을 것으로 보인다. 창녕 화왕산 남쪽에 있었던 이 사찰은 신돈이 죽임을 당한 뒤 곧 폐쇄되었다. 그 뒤 다시 고쳐 지어졌지만, 완성되기 직전에 다시 헐리고 말았다.
옥천사와 인연을 맺은 신돈이 어느 종파의 승려였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화엄종 계열 승려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의 법명이 편조(遍照)였다는 점, 옥천사가 신라 화엄종의 개조(開祖)였던 의상(義湘)의 화엄 10찰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 화엄 법회의 성격을 지닌 문수회(文殊會)를 자주 개최했다는 점 등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신돈의 사상경향은 화엄종 외에도 천태종, 밀교, 선종, 라마교 등 다양한 종파의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돈과 공민왕의 만남은 1358년(공민왕 7)경 김원명(金元命)의 소개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공민왕은 당시 정치세력을 '세신대족(世臣大族), 초야신진(草野新進), 유생(儒生)’ 등으로 구분하고 이들을 모두 불신하고 있었다. 이들이 문벌이나 혼인관계, 학문적 유대 관계를 통해 정치세력으로 결집하여 당여가 형성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권을 강화하면서 국정 운영을 주도할 수 있는 돌파구를 찾고 있던 공민왕에게 신돈은 그 적임자였다. 공민왕은 그를 승려로서 욕심이 없고 미천하여 친당(親黨)을 형성하지 못할 인물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원나라 정치 상황도 신돈의 정계 진출을 촉진하였다. 기황후(奇皇后)의 아들인 황태자가 복권되어 황제와 같은 지위를 갖게 되고, 기황후가 정후로서 위상을 확보하고 있는 원나라 정국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던 공민왕은 자신을 대신해 원 황실의 압력을 막아내면서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해 줄 수 있는 방파제와 같은 존재가 절실하였다. 신돈을 발탁하여 국정 운영의 중심에 서게 한 것은 그 방안의 하나였다.
신돈은 1365년(공민왕 14) 5월부터 공민왕의 사부(師傅)가 되어 국정을 자문하면서 집권의 기반을 다졌다. 먼저 재상급인 찬성사 벼슬에 있던 최영(崔瑩)을 계림윤(鷄林尹)으로 좌천시키고, 이구수(李龜壽) · 양백익(梁伯益) 등을 유배 보내어 무장 세력에 타격을 가한 다음, 6월에 가서는 김보(金普)를 수상으로 하는 인사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후에도 이전의 집권 세력과 그 동조자들에 대한 숙청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동안 무장 세력 중심의 권력 집단은 해체되었고, 국왕 측근 세력 중심의 권력 집단으로서 신돈 정권이 성립되었다. 공민왕은 1365년 7월 신돈을 진평후(眞平侯)로 책봉하고, 이해 12월에는 신돈에게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 판중방감찰사사(判重房監察司事),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 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라는 막강한 지위를 부여하여 개혁 추진의 동력을 마련해 주었다.
개혁은 토지 점탈과 예속민 문제를 해결하려는 전민변정(田民辨整) 사업부터 시작되었다. 1366년(공민왕 15) 5월 전민추정도감(田民推整都監)을 설치하고, 신돈이 그 책임자인 판사(判事)가 되어 권세가들이 탈점한 토지와 노비를 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아울러 천인 가운데 양인이었음을 호소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양인으로 해방시킨다는 방침도 제시되었다. 이렇게 하여 변정 사업은 백성의 지지를 받으면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온 나라에서 모두 기뻐하고 노비들이 신돈을 ‘성인(聖人)’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전민변정 사업에 이어 교육개혁과 관료체계의 정비도 함께 추진되었다. 교육개혁은 국학의 중흥을 표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367년(공민왕 16) 5월, 성균 좨주(成均祭酒) 임박(林樸)의 건의에 따라, 숭문관(崇文館) 옛터에 국학의 중영(重營)을 명하면서 교육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국학 중흥책은 학교 건물을 중건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학생 수를 늘리고, 교육과정을 오경사서재(五經四書齋)로 편성하는 등 경학교육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는 경학에 밝은 신진 세력을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정치적 의도도 작용한 것이었다. 그래서 판개성부사 이색(李穡)으로 대사성을 겸하게 하고, 김구용(金九容) · 정몽주(鄭夢周) · 박상충(朴尙衷) · 박의중(朴宜中) · 이숭인(李崇仁) 등 경학과 제술에 뛰어난 인물들로 학관(學官)을 겸하게 하였다.
교육개혁과 함께 관료 체계의 정비도 추진되었다. 그것은 산관(散官)에 대한 통제와 순자격제(順資格制, 순자법)의 시행으로 나타났다. 1367년 8월에 산관을 서울에 올라와 숙위하게 한 조치는 바로 이들을 통제하여 관료 사회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1368년 12월에 시행한 순자격제는 관료를 승진시킬 때 그 능력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근무 연한을 기준으로 삼자는 것이었다. 순자격제의 시행은 군공 중심의 능력 평가를 지양하고, 관료의 임면과 승진 등 인사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비리를 막아 관료 사회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개혁 정치의 추진으로 신돈의 정치적 지위가 강화되면서 여기에 제동을 걸려는 반대 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신돈 정권에 대한 저항은 1366년(공민왕 15) 4월, 정추(鄭樞) · 이존오(李存吾)의 신돈 비판 상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367년 10월과 1368년 10월, 1년 간격을 두고 신돈을 제거하려는 모의가 발각될 정도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공민왕은 점차 신돈을 앞세운 개혁과 왕권 강화 방식을 재고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신돈 집권이 장기화되면서 신돈을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집단이 형성되는 것도 공민왕으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점이었다. 비록 신돈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왕이 용인하는 범위 내에서였다. 1369년(공민왕 18) 2월 신돈이 ‘오도도사심관(五道都事審官)’을 겸하려 하였을 때 왕이 이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입장의 변화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1369년 초부터 전개되는 국내외 정세도 신돈에게는 불리한 여건으로 작용하였다. 국내적으로는 왜구의 침탈이 계속되는 터에, 영전역(影殿役)의 강행과 기근으로 말미암아 민의 곤궁화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고 있었다. 명(明)의 건국이라는 나라 밖의 정세도 신돈의 집권에 제약을 가하고 있었다. 1370년(공민왕 19) 5월 명나라 황제가 보낸 조서(詔書)에는 승려의 정치 개입을 경계하라는 등 신돈의 집권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공민왕으로서는 이러한 명나라의 정치 간섭을 외면할 수만도 없는 형편이었다.
공민왕은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직면하여 이를 돌파할 수 있는 정치적 결단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1370년 10월 공민왕의 친정(親政) 선언으로 가시화되었으며, 이제 신돈 집권 시대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이후 신돈은 아무런 정치적 대응도 하지 못한 채 9개월 뒤인 1371년(공민왕 20) 7월 9일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수원에 유배되었다가 이틀 뒤 그곳에서 처형되었다. 신돈의 처형과 함께 신돈의 추종자로 지목된 이춘부(李春富) 등 60여 명도 함께 제거되었다.
신돈은 『고려사(高麗史)』 「반역전(叛逆傳)」에 실린 인물이다. 『고려사』에서 전하고 있는 신돈에 대한 평가는 일반 민과 관료 집단 사이에 상반되게 묘사되어 있다. 일반 민들은 신돈을 성인(聖人), 신승(神僧), 문수(文殊)의 후신 등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반면, 개혁의 대상으로 몰렸던 기득권 세력은 신돈을 요승(妖僧), 사승(邪僧), 용승(庸僧), 미승(微僧), 노호(老狐) 등으로 비하하고 있다.
부정적 평가는 신돈의 개인적 비행이나 승려 신분으로 직접 정치에 참여한 문제에 집중되었는데, 이는 신돈이 실각하여 처형된 후 기득권 세력에 의해 덧칠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조선 건국 주도 세력이 공양왕을 옹립하는 과정에서 우왕과 창왕을 부정하는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 ‘폐가입진론(廢假立眞論)’ 등을 제기하면서 신돈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주된 경향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신돈은 공민왕의 왕위 유지와 왕권 강화를 위해 끝까지 자기 임무를 다하였다. 반역으로 몰려도 이렇다 할 저항 한번하지 않고 왕명을 수용할 정도였다. 집권 기간 신돈이 추진한 개혁의 목적은 민생 문제의 해결과 국가 재정난의 타개, 정치 질서의 회복 등이었다. 신돈의 개혁은 현실의 사회경제적 폐단을 시정하려는 측면과 이를 통해 국왕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함께 가졌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