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산(靈山). 충혜왕(忠惠王)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내고 좌정언(左正言)과 지신사(知申事)를 거쳐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지공거(知貢擧) 김진(金稹)과 함께 지신사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진사(進士) 33인을 뽑았으며, 1343년에는 원나라에 갔다가 매서인 원나라의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와 함께 돌아왔다.
이 해 충혜왕을 잡으러 원나라에서 사신이 왔을 때 환관(宦官) 고용보와 함께 원사(元使)를 도와 왕을 잡아가게 하였다. 그 뒤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전 첨의참리(僉議參理)로서 서연(書筵)에서 시강(侍講)하였으며, 1345년(충목왕 1) 정방(政房)을 복치(復置)하였을 때에는 참리로 그 제조관(提調官)이 되었다.
충목왕 때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신예의 행동에 대해서는 “매부인 고용보의 세력을 믿고 남의 재물을 강탈하고, 벼슬을 파는 등 횡포가 심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지목하여 신왕(辛王)이라 하였다.”한다. 특히, 전숙몽(田淑蒙) 등과 더불어 친척과 친구에게 경상(卿相)의 자리를 주고 정권을 농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