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보는 고려 후기 원나라 황실에서 활동한 고려 출신 환관이다. 원나라에서 휘정원사(徽政院使)로 활동했던 고려 출신 환관 정투멘데르[鄭禿透滿迭兒]와는 다른 사람이다. 충혜왕 때 삼중대광(三重大匡)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진 후 기황후 세력으로 활동하였으며, 1343년(충혜왕 복위 4) 11월 충혜왕을 체포하여 원나라로 압송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352년(공민왕 1) 조일신의 난 때 피신하여 죽음을 면하고 해인사에 숨어 지내다가 1362년 공민왕이 보낸 어사중승 정지상에게 주살되었다.
고려 출신 원나라의 환관(宦官)으로, 그의 이름은 『고려사(高麗史)』 등에서는 ‘용보(龍普)’로 전하고 있으나, 『원사(元史)』에서는 ‘용복(龍卜)’이라 하였다. 이곡(李穀, 12981351)이 쓴 「중흥대화엄보광사기(重興大華嚴普光寺記)」와 「금강산장안사중흥비(金剛山長安寺重興碑)」, 권근(權近, 13521409)이 쓴 「사재소감박강전(司宰少監朴强傳)」 등에서는 그의 이름을 ‘용봉(龍鳳)’이라 하고, 고려 전주(全州) 사람으로 소개하였다. 충목왕(忠穆王) 4년에 작성된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기문에서도 ‘대시주 원사 고용봉(大施主院使高龍鳳)’의 존재가 확인된다.
고용보를 원나라에서 휘정원사(徽政院使)로 활동한 투멘데르[禿滿迭兒, 禿滿達]와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그 성씨나 활동 내용으로 보아 다른 인물이다.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쓴 「한국공정공사당기(韓國公鄭公祠堂記)」에서, 투멘데르는 하동정씨 정투멘데르[鄭禿滿達]로 아버지는 정인(鄭仁), 할아버지는는 정성량(鄭性良), 증조할아버지는 정공윤(鄭公允)이라고 가계를 밝히고 있다.
투멘데르는 1300년(충렬왕 26) 그의 나이 11세 때 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성종에서부터 순제때 까지 원 궁정에서 숙위하였으며, 휘정원사로서 활동하면서 뒷날 황후가 되는 기씨를 궁녀로 천거하였다고 한다.
고용보는 원나라 궁정에 환관(宦官)으로 들어가 활동하였고, 1340년(충혜왕 복위 1) 12월 기황후(奇皇后)의 재정 기관으로 자정원(資正院)이 설립되면서 여기에 소속되어 자정원사로 활동하였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2월 고려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지면서부터 고려로 자주 들어오는데, 주로 기황후의 어머니 이씨를 원나라로 모셔가거나, 기황후의 부모를 봉증(封贈)하기 위해 방문하는 등 주로 기씨 일족을 돕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충혜왕(忠惠王)이 기씨 일족을 비롯한 부원세력(附元勢力)을 숙청하려 하자, 고용보는 충혜왕을 체포하여 원나라로 보내는 데 앞장섰다. 1343년(충혜왕 복위4) 10월, 황제가 보낸 술과 의복을 국왕에게 전달한다는 구실로 고려에 들어온 고용보는 같은 해 11월 22일 원나라에서 파견된 대경(大卿) 도치[朶赤] 등과 함께 충혜왕을 정동행성(征東行省)으로 유인하여 습격, 체포한 후에 원나라로 압송하였다.
원나라 연경(燕京)에 도착한 충혜왕은 이해 12월 21일, 원 순제의 명에 따라 연경에서 2만여 리나 떨어진 게양현(揭陽縣)으로 유배되었고, 이듬해인 1344년(충혜왕 복위 5) 1월 14일 유배 도중 악양현(岳陽縣)에서 사망하였다.
도치[朶赤] 등은 충혜왕을 압송해 가면서 고용보에게는 국사(國事)를 담당하도록 하고, 기철(奇轍)과 홍빈(洪彬)에게 정동행성을 관장하도록 하여 국왕 공백 상태를 메우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고용보는 박양연(朴良衍) 등 충혜왕 측근 세력을 체포 수감하고, 은천옹주(銀川翁主) 등 궁인을 추방하였으며, 왕실 자산[내탕(內帑)]을 봉인하여 충혜왕의 정치, 경제 기반을 와해시켰다.
고용보는 1344년 2월 충목왕(忠穆王)을 즉위시키는 데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뒷날 충목왕 후임으로 충혜왕의 아들 왕저(王㫝, 충정왕)와 충혜왕의 동생 왕전(王顓, 공민왕)이 왕위 계승 다툼을 벌일 때에 고용보는 충정왕의 즉위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권세를 누리던 고용보의 위상도 1347년(충목왕 3)을 고비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6월 원나라 황제는 온갖 비행을 일삼은 고용보를 주살(誅殺)해야 한다는 어사대(御史臺)의 요구에 따라 그를 고려의 금강산으로 추방하였다. 1352년(공민왕 1) 9월에 발생한 조일신의 난 때에 살해의 대상이 되자, 도망하여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서 숨어 살다가 1362년(공민왕 11) 2월 공민왕이 보낸 어사중승(御史中丞) 정지상(鄭之祥)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2월 삼중대광(三重大匡) 완산군(完山君)에 책봉되었다. 1344년 5월 충목왕을 즉위시킨 공으로 12자(字)의 공신호(功臣號)를 하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