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고용보는 고려 후기 원나라 황실에서 활동한 고려 출신 환관이다. 원나라에서 휘정원사(徽政院使)로 활동했던 고려 출신 환관 정투멘데르[鄭禿透滿迭兒]와는 다른 사람이다. 충혜왕 때 삼중대광(三重大匡)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진 후 기황후 세력으로 활동하였으며, 1343년(충혜왕 복위 4) 11월 충혜왕을 체포하여 원나라로 압송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352년(공민왕 1) 조일신의 난 때 피신하여 죽음을 면하고 해인사에 숨어 지내다가 1362년 공민왕이 보낸 어사중승 정지상에게 주살되었다.
정의
고려 후기 원나라 황실에서 활동한 고려 출신 환관.
가계 및 인적 사항
고용보를 원나라에서 휘정원사(徽政院使)로 활동한 투멘데르[禿滿迭兒, 禿滿達]와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그 성씨나 활동 내용으로 보아 다른 인물이다.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쓴 「한국공정공사당기(韓國公鄭公祠堂記)」에서, 투멘데르는 하동정씨 정투멘데르[鄭禿滿達]로 아버지는 정인(鄭仁), 할아버지는는 정성량(鄭性良), 증조할아버지는 정공윤(鄭公允)이라고 가계를 밝히고 있다.
투멘데르는 1300년(충렬왕 26) 그의 나이 11세 때 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성종에서부터 순제때 까지 원 궁정에서 숙위하였으며, 휘정원사로서 활동하면서 뒷날 황후가 되는 기씨를 궁녀로 천거하였다고 한다.
주요 활동
충혜왕(忠惠王)이 기씨 일족을 비롯한 부원세력(附元勢力)을 숙청하려 하자, 고용보는 충혜왕을 체포하여 원나라로 보내는 데 앞장섰다. 1343년(충혜왕 복위4) 10월, 황제가 보낸 술과 의복을 국왕에게 전달한다는 구실로 고려에 들어온 고용보는 같은 해 11월 22일 원나라에서 파견된 대경(大卿) 도치[朶赤] 등과 함께 충혜왕을 정동행성(征東行省)으로 유인하여 습격, 체포한 후에 원나라로 압송하였다.
원나라 연경(燕京)에 도착한 충혜왕은 이해 12월 21일, 원 순제의 명에 따라 연경에서 2만여 리나 떨어진 게양현(揭陽縣)으로 유배되었고, 이듬해인 1344년(충혜왕 복위 5) 1월 14일 유배 도중 악양현(岳陽縣)에서 사망하였다.
도치[朶赤] 등은 충혜왕을 압송해 가면서 고용보에게는 국사(國事)를 담당하도록 하고, 기철(奇轍)과 홍빈(洪彬)에게 정동행성을 관장하도록 하여 국왕 공백 상태를 메우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고용보는 박양연(朴良衍) 등 충혜왕 측근 세력을 체포 수감하고, 은천옹주(銀川翁主) 등 궁인을 추방하였으며, 왕실 자산[내탕(內帑)]을 봉인하여 충혜왕의 정치, 경제 기반을 와해시켰다.
고용보는 1344년 2월 충목왕(忠穆王)을 즉위시키는 데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뒷날 충목왕 후임으로 충혜왕의 아들 왕저(王㫝, 충정왕)와 충혜왕의 동생 왕전(王顓, 공민왕)이 왕위 계승 다툼을 벌일 때에 고용보는 충정왕의 즉위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권세를 누리던 고용보의 위상도 1347년(충목왕 3)을 고비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6월 원나라 황제는 온갖 비행을 일삼은 고용보를 주살(誅殺)해야 한다는 어사대(御史臺)의 요구에 따라 그를 고려의 금강산으로 추방하였다. 1352년(공민왕 1) 9월에 발생한 조일신의 난 때에 살해의 대상이 되자, 도망하여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서 숨어 살다가 1362년(공민왕 11) 2월 공민왕이 보낸 어사중승(御史中丞) 정지상(鄭之祥)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원전
- 『가정집(稼亭集)』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동사강목(東史綱目)』
- 『양촌집(陽村集)』
- 『원사(元史)』
- 『익재집(益齋集)』
단행본
- 김광철, 『원간섭기 고려의 측근정치와 개혁정치』(경인문화사, 2018)
- 이승한, 『고려왕조의 위기, 혹은 세계화 시대』(푸른역사, 2015)
논문
- 권용철, 「고려인 환관 고용보와 대원제국 휘정원사 투멘데르[禿滿迭兒]의 관계에 대한 소고」(『사학연구』 117, 한국사학회, 2015)
- 이정신, 「원간섭기 환관의 행적」(『한국사학보』 57, 고려사학회, 2014)
- 김형수, 「충혜왕의 폐위와 고려 유자들의 공민왕 지원 배경」(『국학연구』 19, 한국국학진흥원, 2011)
- 신은제, 「14세기 전반 원의 정국동향과 고려의 정치도감」(『한국중세사연구』 26, 한국중세사학회, 2009)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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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강융(姜融)이 주관하여 경천사에 세운 석탑.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회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었으며, 1909년 무렵에 일본으로 불법 반출되었다가 반환되어 1960년에 서울 경복궁 안에 재건되었으며,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우리나라 국보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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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봉작(封爵)과 증직(贈職)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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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죄를 물어 죽임.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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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고려시대에, 정사를 논의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백관을 감찰ㆍ탄핵하던 관아. 성종 14년(995)에 사헌대를 고친 것으로, 현종 5년(1014)에 금오대로 고쳤다가 충렬왕 원년(1275)에 감찰사로 고쳤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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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고려시대에, 어사대에 속한 종사품 벼슬.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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