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보의 가계 및 인적 사항 관련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강보(姜保)는 천문 역법에 능통하여 고려시대 천문(天文), 역수(曆數), 측후(測候), 각루(刻漏)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서운관(書雲觀)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1346년(충목왕 2) 11월에 서운승(書雲丞) 손광사(孫光嗣)가 쓴 『수시력첩법입성(授時曆捷法立成)』 서문에 따르면, 강보는 광양군(光陽郡) 최성지(崔誠之)로부터 역법(曆法)을 전수받았다. 1304년(충렬왕 29)경 최성지는 원나라에서 충선왕을 시종(侍從)하고 있었는데, 천문 역법에 능통한 원나라 과학기술자들로부터 수시력법(授時曆法)을 배웠고, 국내에 돌아와 이를 전수하게 되는데, 강보가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천문 역법을 터득한 강보는 1335년(충숙왕 복위 4)에 서운사력(書雲司曆)으로 발탁된 후, 1346년(충목왕 2)에는 서운정(書雲正)으로 승진하였다. 1352년(공민왕 1) 1월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로 재직 중 국왕이 태묘에 직접 제사를 지내려 하자 이를 막아나섰다. 강보는 음양구기설(陰陽拘忌說)에 근거하여 국왕이 몸소 제사를 지내면 안 된다고 건의하였던 것이다. 이에 도당(都堂)에서는 제사가 나라의 중요한 행사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강보를 크게 질책하였다. 재상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모후인 명덕태후(明德太后)의 지원에 힘입어 강보의 건의는 수용되었고, 국왕은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강보는 서운관에서 근무하면서 서운정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 그가 알고 있는 수시력 관련 지식을 진사 이인실(李仁實)에게 받아쓰게 하여 서운관에 보관했는데, 이것이 『 수시력첩법입성(授時曆捷法立成)』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서문은 당시의 서운승(書雲丞) 손광사(孫光嗣)가 맡았으며, 간기는 1346년(충목왕 2) 11월로 되어 있다. 전사본으로 되어 있던 이 책은 1444년(세종 26) 갑인자로 인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