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자야(子野), 호는 매계(梅溪)이며, 선대 가계는 확인되지 않는다. 부인 문씨(文氏)는 광주(光州) 갑향(甲鄕) 사람인데, 1388년(우왕 14) 7월 왜구 침입 때 순결을 지킨 행적이 높이 평가되어 열녀로 칭송을 받았으며, 『고려사(高麗史)』 「열녀전」에 실려 있다. 자녀 둘이 있었는데, 왜구 침입 때 희생된 것으로 전한다.
강호문은 1362년(공민왕 11) 10월 우시중(右侍中) 홍언박(洪彦博)과 지도첨의(直都僉議) 유숙(柳淑)이 좌주(座主)가 되어 주관한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때 강호문과 함께 과거에 합격한 인물들은 박의중(朴宜中), 이숭인(李崇仁), 허시(許時), 정도전(鄭道傳), 설장수(偰長壽), 한리(韓理) 등 33명이었다.
과거 합격 후 강호문이 어떤 벼슬을 지냈는지 당시 인사 발령 기록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고려사』 「열녀전」에서 그의 부인 문씨를 소개하면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강호문에게 시집갔다”는 기록이 있어서, 강호문의 최종 벼슬이 판전교시사였음을 알 수 있다. 강호문은 성균사예(成均司藝)도 역임하였는데, 이는 이색(李穡)이 쓴 ‘사암(思菴) 유숙(柳淑)의 시권(詩卷)에 보낸 서문(序文)’에서 확인된다.
강호문은 수령인 천안부사(天安府使)로도 활동했는데, 그가 재임 중 직접 쓴 「영주남원루기(寧州南院樓記)」에서 “지난 계축년(1373년, 공민왕 22) 봄에 내가 조정의 명령으로 이 고을에 부임하게 되었다”고 한 데서 드러나고 있다.
강호문은 말년에 전라도 담양에 우거(寓居)한 것으로 전한다. 유교 지식인들과의 교유도 활발하여 같은 시기에 급제한 이숭인, 정도전과 돈독하게 지냈고, 이색, 정몽주(鄭夢周)와도 친교를 맺었다. 특히 권근(權近)은 그의 시 「남행록(南行錄)」에서 “자야(子埜) 강 선생이 역마를 달려 찾아보고 작별한 뒤에 시 두 수를 부쳐 왔다〔子埜康先生馳馹見訪, 別後寄詩二首〕”라고 하여, 둘 사이 친분이 남달랐음을 보여주고 있다.
강호문은 시문(詩文)에 능하여, 천안부사로 재직할 때 그곳의 누정 기문(記文)인 「대소원기(大召院記)」와 「영주남원루기(寧州南院樓記)」를 지었다. 『동문선』에는 그의 시로 「금주(錦州)로 부임하는 김시승(金寺丞)을 보내며〔次金寺丞赴錦州韻〕」’, 「제웅천강(題熊川江)」, 「우제(偶題)」 등 3수가 수록되어 있다. 정몽주의 『포은집(圃隱集)』에도 강호문의 「포은 상국의 복직을 축하하다〔賀圃隱相國復職〕」라는 시가 소개되어 있다. 권근의 『양촌집(陽村集)』 「남행록(南行錄)」에서도 “강(康) 선생이 또 장구(長句) 4운(韻)을 부쳐 왔는데 그 운을 차한다〔康先生又寄長句四韵, 次其韵〕”라고 하여 강호문이 여러 편의 시를 지었음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