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고(權皐)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할아버지는 충렬왕 때 찬성사(贊成事) 벼슬을 지낸 권단(權㫜)이며, 할머니는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를 지낸 교하노씨 노연(盧演)의 딸이다. 아버지는 충숙왕 때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역임한 권부(權溥)로,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를 지낸 문화유씨 유승(柳陞)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다섯과 딸 넷을 두었다.
장남은 찬성사를 역임한 권준(權準), 차남은 승려로 양가도총섭(兩街都摠攝)인 종정(宗頂), 3남이 권고(權皐)이다. 4남은 왕씨 성을 하사받은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왕후(王煦, 權載), 5남이 복안부원군(福安府院君) 권겸(權謙)이다. 장녀는 안유충(安惟忠)과 혼인하였고, 차녀는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이제현(李齊賢)과, 3녀는 종실 순정대군(順正大君) 왕숙(王璹)과, 4녀는 종실 회안대군(淮安大君) 왕순(王珣)과 혼인하였다.
권고는 찬성사를 역임한 합천이씨 이설(李偰)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남 권엄(權儼)은 판서, 차남 권간(權侃)은 군부정랑(軍簿正郎), 3남 권희(權僖)는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을 지냈다.
『고려사(高麗史)』 등 사서(史書)에 수록된 권고의 벼슬살이와 활동 내용에 대한 정보는 자세하지 않다. 처음에 문화군(文化君)이었다가 1355년(공민왕 4) 5월 인사에서 영가군(永嘉君)으로 봉해졌고, 뒤에 검교시중(檢校侍中)에 이르렀으며,, 1379년(우왕 5) 5월 86세 나이로 죽었는데, 시호를 충정(忠靖)이라 하였다는 정도이다. 그런데 경주부윤선생안(慶州府尹先生案)인 『동도역세제자기(東都歷世諸子記)』에서는 권고가 1327년(충숙왕 14) 4월에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부임하였고, 이전 벼슬은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사사(密直司事)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권고의 아버지 「권부묘지명(權溥墓誌銘)」과 어머니 「변한국태부인유씨묘지명(卞韓國太夫人柳氏墓誌銘)」에서는 권고가 지첨의사사(知僉議司事) 벼슬을 지낸 것으로 전하고 있다. 『고려사』 열전에서는 권고가 일찍이 그의 아들인 정랑(正郞) 권간(權侃)과 토지를 다투었는데, 권간을 불러도 오지 않자 노하여 임신 중인 며느리를 발로 차 낙태시키고 죽게 하였다는 불미스런 일화를 전하고 있다.
처음에는 문화군(文化君)에 책봉되었다가 1355년(공민왕 4) 영가군(永嘉君)에 책봉되었다.